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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투표와 다수결의 유래
[477호] 2022년 12월 16일 (금) 김정룡 기자 jzl0917@naver.com

투표의 사전적인 의미 해석이 궁금해서 네이버 선생한테 물었다.

선거를 하거나 가부를 결정할 때에 투표용지에 의사를 표시하여 일정한 곳에 내는 일.”

이 해석은 11표 선거민주주의를 실시하는 나라에서 대선, 총선, 지방선거를 치를 때 및 조직 내에서 가부를 결정하는데 다수의 찬성이 필요할 때 투표방식인 비밀투표를 의미한다. 사실 투표에는 공개투표, 반공개투표, 비밀투표 등 세 가지 방식이 있거늘 왜 한국식 해석은 비밀투표에만 의미를 부여하는 걸까?

한국사회는 신식민지국가로서 서양식 문물에 경도되어 무엇이든 서양식 해석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역사를 돌아보면 투표는 본래 공개투표방식이 가장 먼저였고 공개투표가 외부의 부당한 압력과 타인의 체면을 의식하여 눈치 보느라 본인의 의사를 제대로 표시할 수가 없어 반공개투표 방식이었다가 나중에는 아예 익명 비밀투표가 성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민주주의 본산지로 알려진 고대 아테네에서는 그날그날의 의제는 ‘500인 위원회에서 결정되었으며 모든 입법·행정 정책은 투표로 결정되었다. 투표는 거수 방식으로 결정되었으며, 승자는 9명의 총재들에 의해 확정되었다. 고대 아테네 사람들은 제도가 악용되지 않도록 무척이나 노력을 기울였다. 예컨대, 사전 매수 행위를 방지하기 위해 9명의 선거 관리원들은 의회가 열리는 날 아침에서야 무작위로 결정되었다.

500인 위원회 의원이 바로 투표에 의해 선출되었는데 공개투표방식이었다. 아테네의 의회는 언덕 꼭대기에 마련된 원형경기장에서 열렸는데 대략 6000~13000명이 모여 투표에 참여했고 거수방식이었다.

공개투표는 거수방식이 주를 이뤘으나 기타 방식도 있었다. 예컨대 고대 아테네 자유민 남성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의회에서는 일부 고위 관리들을 선출하기도 했는데, 군대의 장군들이 대표적 사례였다. 사람들은 엄지손가락을 위로 올리거나 아래로 내리는 방식으로 해마다 10명의 장군들을 선출했다.아테네 의회는 법률 통과 외에도 아테네의 모든 형사 및 민사 재판에서 평결을 내리는 일도 했다. 아테네의 배심원은 12명이 아니라 200~5,000명 정도였다. 당시 다른 투표들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진 반면에 아테네 배심원단은 돌을 사용한 특별한 종류의 비밀투표를 실시했다. 각 배심원에게는 작은 돌 두 개가 주어졌는데, 하나는 그냥 단단한 돌이고 다른 하나는 중앙에 구멍이 뚫린 돌이었다. 투표할 때가 되면 배심원들은 두 개의 항아리에 다가가서 실제 평결 의사는 첫 번째 항아리에 집어넣고 남은 돌을 두 번째 항아리에 던져 넣었다. 어떤 돌이 어느 항아리에 들어갔는지는 아무도 눈치 챌 수 없었다.이것이 비밀투표의 원조가 아닌지? 스파르타에는 함성 투표라는 재미나는 투표방식이 있었다. 스파르타의 최고 통치기구 중 하나는 2명의 왕과 28명의 선출직 관리로 구성된 장로 위원회였으며, 이들은 모두 60세 이상이었고, 평생 직책을 맡았다. 관리를 선출하기 위해 스파르타인들은 환호 투표라고도 하는 독특한 방식의 함성 선거를 도입했다. 후보자들이 돌아가면서 큰 집회장으로 걸어가면 사람들이 박수로 찬반 의사를 표시했다. 이때 보이지 않는 다른 방에 있던 심사위원들이 소리의 양을 비교하여 승자를 선택했다.로마 공화정의 두 의회인 부족 의회평의회에서의 투표는 제비뽑기로 결정되었다. 의회의 각 구성원이 손을 들고 공개적으로 투표를 하는 방식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지배층이 투표에 압력을 행사하는 일이 잦아지자 비밀투표가 도입되게 되었다.역사기재에 의하면 기원전 139년에 로마는 새로운 유형의 비밀 투표를 도입했다. 투표자는 의사 표시를 한 나무판자를 투표함에 밀어 넣었다. 물론 기득권인 귀족들은 이러한 비밀투표에 대해 광분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의 영향력이 먹혀드는 투표 방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밀투표는 11표 선거민주주의 주요한 투표방식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선거를 하거나 주요 사안을 의결할 때 왜 투표방식을 채택했나? 그 해답은 아주 간단하다. 다수결의 논리 때문이다.

다수가 찬성하면 옳은 일인가? 예를 들어 조직에서 다수의 찬성에 의해 선출된 간부는 진짜 유능한 인재일까? 11표선거민주주의의 투표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은 진짜 대통령 자격이 있는 유능한 통치자일까?

답은 긍정적이지 못하다. 그럼 이런 폐단을 알고도 왜 인류는 다수결을 지지하는 걸까?

먼저 서양의 다수결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자.

탈무드에 재미나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랍비(기독교 신부에 해당함)가 새로운 해석을 제안했다가 부결 당했다. 그는 자신의 해석이 올바르다고 주장하며 그 증거로 기적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실제로 기적을 보여준 다음 다시 평결에 부쳤지만 부결당하고 말았다. 그는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하늘을 향해 신이여, 제가 옳다는 것을 말해주십시오.”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하늘에서 쓸데없는 토론을 하고 있느냐, 그의 제안이 옳지 않는가.”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다시 평결에 부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신의 말을 무시한 것도 재미있지만 이것은 신의 뜻이 다수결을 통해서만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수결 이외의 방법으로는 신의 뜻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신의 계시를 받았다. 고로 나의 제안이 옳다.’라는 접신(接神) 주장은 일절 인정받을 수 없으며 인정받는 방법은 오로지 다수결이다.

서양에서 나타난 공통점은 다수결은 신의 뜻을 나타낸 것이므로 절대적이다.’라는 사고이다. 다수가 찬성했으므로 올바르다.’라는 생각이 아니라 신의 뜻이므로 올바르다라는 생각이다.

다수결의 논리가 종교의 영향과 관련이 있는 것은 동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씨족이나 대가족에 속한 상태에서 족장이나 가장의 권위를 무시하고 자신의 소신대로 자유롭게 투표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자유롭게 투표하기 쉬운 방법은 오로지 출가이다. 승려는 속세와의 모든 인연을 끊고 부처를 따른다. 그들은 씨족이나 대가족과는 다르게 혈연의 관계가 없기 때문에 비교적 자유로웠다. 물론 불교계 내 서열문제 등 전혀 아무 영향이 없는 것은 아니나 상대적으로 속세에 비해 자유로웠다는 것이다.

다어비니(多語毘尼)라는 불전이 있다. 교단 내부 문제에 대해 논쟁이 계속 될 때의 해결 방법이 담긴 교전(敎典)인데 그 해결 방법 가운데 하나가 바로 다수결의이고 공개투표, 반공개투표, 비밀투표를 사용했다. 중국 불교계는 다어비니의 다수결을 사용했다가 대승불교(개혁불교)와 소승불교(보수불교)의 분열이 일어나서 그 뒤로부터는 사용하지 않은데 비해 일본에서는 다어비니 다수결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시행해왔던 것이다. 중국은 불교사와 불전을 모두 중시했던데 비해 일본은 불전에만 신경 쓰고 불교사에 대해선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복잡한 문제들을 회피해온 결과일 것이다.

헤이안시대(794~1185) 대사원의 승려는 국가공무원 신분이었기 때문에 속세의 룰에 따라 서열의식이 강했다. 하지만 그들은 진호국가(鎭護國家)라는 공동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평등한 일미동심(一味同心, 마음을 하나로 하여 한편이 됨)을 이룰 수가 있었다. 그러나 승려들도 인간인 것만큼 절대적인 공정을 지킬 수는 없었다. 그래서 교계 내의 의사를 결정할 때는 비밀투표 방식을 택했다. 당시 승려들의 비밀투표는 오늘 날 비밀투표와는 더 철저한 비밀이었다. 3천 명이 모인 장소에서 승려들은 머리와 얼굴을 드러내고 참석할 수 없었다. 말할 때는 코를 눌러 목소리를 변조했으므로 옆 사람이 누구인지 몰랐다.

승려 전원이 모이면 누군가 변조한 목소리로 만산의 승려들은 모였는가?’라고 크게 외친 후 안건을 설명한 뒤 한 건마다 찬부를 물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일본은 중세시기부터 다수결의 원칙이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일본의 이 다수결의 원칙이 일본인들이 족연, 혈연, 지연을 끊고 구성원들의 공동이익을 위해 뭉친 잇키(一揆)’라는 조직을 탄생시켰으며 이 잇키(一揆)’ 문화가 전체 일본사회에 널리 보급되어 서양의회민주주의 수입에 지대한 기여를 했던 것이다. 아울러 메이지정부에 이르러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지대한 기여를 했던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일본 하면 떠오르는 것이 모방력이 뛰어나 서양의 사이언스(과학)와 데모크라시(민주) 수입에 앞장 서 오늘의 일본을 있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은 일본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수박 겉핥기 식 피상적인 인식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인의 성격 중 주요 요소인 복종과 충성 및 대세에 따르고 아무리 큰 일이 생겨도 혼란스럽지 않고 질서 정연한 모습들은 잇키(一揆)’ 문화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잇키(一揆)’ 문화를 모르면 일본과 일본인을 말할 자격이 없다.

다음 글에서 잇키(一揆)’ 문화에 대해 자세하게 살펴보기로 하겠다.

김정룡 다가치포럼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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