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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는 가슴 뛰는 일에 도전하였다
베이징조선족기업가협회 초대 회장 김 의 진
[471호] 2022년 09월 16일 (금) 김정룡 기자 jzl0917@naver.com

베이징조선족기업가협회 초대 회장, 중국아주경제발전 협회 상무 부회장, 중 앙민족대학 특별 초빙교수, 민족교육 발전기금회 이사장 등 무게 있는 사회적 직함이 그의 활동범위를 말해주고 있다. 이런 타이틀은 지난 세 월 멈추지 않고 달려온 그의 행보를 엿볼 수 있도록 해주는 대목이다. 얼마 전 중한 수교 30주년 기념문집 출판과 관련하여 김 회장에게 인터뷰를 요청하였다.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들은 중한 양국의 민간교류에서 가교의 주역 이었습니다. 특히 여행업계와 가이드들이 중요한 역할과 기여를 해왔지 만 아직까지 잘 알려지지 못했고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 점이 아쉬웠습니다.” 중한 양국 교류의 전반 과정에 직접 참여해 온 김의진 회장은 30년의 격정의 나날을 회고하면서 감개무량하였다.

   

 중국 여행업계의 대 한국업무 1인자가 되다

 중국 정부가 한국인들에게 관광비자를 발급하기 시작한 것은 1994년부터라고 한다면 한국인들의 중국으로의 비즈니스 출장은 사실 더 오래 전인 1980년대 말부터 이미 민간차원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중국 외교부는 날로 늘어나는 민간교류의 수요에 부응하기 위하여 베이징의 관련 기관으로부터 통번역 인재들을 긴급 선발하여 양성하기 시작하였다. 1987년 베이징 중앙번역국에서 근무하던 김의진은 외교부 아시아국 (亚洲司)의 호출을 받고 한국인 관광통역 교육을 받게 되었다. “외교부가 직접 여행안내 통역원에 대한 교육을 진행하게 된 것은 당 시 양국이 미 수교국가인 여러 특수성에 비롯된 것이라고 봅니다. 이런 사례는 중국은 물론 국제적으로도 드물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김 회장 은 그 교육과정에서 한국과의 민간교류의 중요성을 터득하였으며 관광 통역원은 민간외교관이라는 대목을 가슴깊이 새겼다고 한다. “30여 년 동안 여행업에 종사하면서 민간외교관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일해 왔고 그 잣대로 직원교육을 실시해왔지요.” 김 회장은 그때 받은 교육은 평생 자신을 편달했다고 한다. 몸에 배인 성실함과 동포에 대한 정 때문에 그는 정해진 통역가이드 임무 외에도 손님들의 여러 가지 심부름을 가타부타 말없이 해주고 열심히 봉사하였다. 한국인들은 이국땅에서 만난 이 조선족 젊은이에게 강한 호감을 갖게 되었고 입소문을 타고 한국에까지 그의 이름이 전해졌다. 차츰 한국 에 있는 다양한 업체들로부터 업무요청 전화를 받게 되었다. 그는 역동 적인 여행업무를 접하면서 편안하지만 따분한 기관 생활보다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고 국제적 시각을 키우는 경제활동에 무한한 매력과 보람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선망하는 국가기관을 미련 없이 떠나 신화여행사로 전근하게 된다. 베이징시 소속 신화여행그룹의 왕회장은 한국여행시장의 향후 잠재력 을 바탕으로 인재영입에 신경을 썼다. 김의진이 갖춘 조건을 파악한 왕 회장은 신설 한국처 처장직을 그에게 맡겼는데 그때만 해도 정부기관의 국장급 대우인 방 3개 달린 아파트까지 제공하는 등 파격적인 대우로 김 의진을 스카웃하였다. 그는 기대이상으로 중국 최초로 한국에서 업무 설명회를 개최하고 한국여행사 중국 시장 답사단을 조직하는 등 발 빠른 행보로 관광시장을 선점하였다. 19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기간에 한국관광단체의 성공적인 유치 및 안내로 그 공로를 인정받아 아시안게임조직위로부터 표창까지 받았다. 하지만 시장과 업무가 확장됨에 따라 업체로부터 여러 가지 규제가 심해지고 업무지원이 따라가지 못하는 등 장애요소들이 존재하면서 더 큰 발전에 한계가 뒤따랐다. 보다 자유로운 사업무대를 갈망한 김 회장은 신화여행사라는 국유기업 철밥통을 과감히 버리고 보다 자유로운 자기 회사를 설립하여 새로운 도전에 뛰어들었다.

   

기업인대회에서 축사를 하고 있는 김의진 회장.

 장쟈제(张家界)를 효도관광의 1번지로 개발하다

 김 회장은 중국을 여행하는 관광객이 날이 갈수록 늘어나면서 부동한 문화를 가진 나라의 관광객들이 각기 다른 취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서양인들과 일본인들은 대체적으로 중국의 역사 문화 고적이나 인문경관을 선호하지만 한국인들은 아름다운 자연산수를 더욱 선호한다는 점을 짚어냈다. 그래서 베이징, 시안(西安), 궈이린(桂林) 등 기존의 주요 관광 코스로는 이미 한국관광객들을 끌기에 부족하다는 것 을 간파하였다. 한국관광객들의 이런 특성과 욕구를 읽어낸 그는 자연관광자원 개발 의 선구자로 나서게 되었다. 그가 직접 개발한 황산(黃山), 쥬짜이꺼우(九寨沟), 하이난도(海南岛) 등 다양한 코스들 중에서도 가장 열풍을 일으켰던 장쟈제(张家界)는 지금도 한국인들이 선망하는 무릉도원으로 인정받아 수십 년간 한국인 여행목적지 1위로 부동의 위상을 고수하고 있다. 그때만 해도 장쟈제는 중국 내에서도 각광받지 못하는 미개척 지역이었다. 장쟈제의 무한한 시장 잠재력을 파악한 김의진은 항공사와 주도면밀한 코스를 편성하고 수십 차에 달하는 시장답사를 조직하면서 시장수요에 맞는 유효적절한 조치들을 강구하였다. 그는 보다 많은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중국동방항공, 중국국제항공, 대한항공 등 항공사들과 업무제휴를 체결하여 항공과 여행상품을 묶은 패키지상품을 대량 개발함으로써 독보적인 시장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으며 장쟈제가 인기코스로 알려지면서 첫해 에만 1만 명이 넘는 한국인 관광객이 다녀가는 기적이 일어났다. 계획을 가진 자가 이기는 법이다. 남다른 안목과 통 큰 투자로 한국관 광객 유치에 성공하였으며 결과 연간 20만 명 이상을 유치하는 기록을 내고 시종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지금도 장쟈제 관광지에 가면 한글 안내문, 한국어로 장사하는 노점 상, 한국관광객을 실은 관광버스들을 어렵잖게 볼 수 있으며 장쟈제의 한국시장개발모델을 벤치마킹하고자 중국 각 도시 관리들이 줄을 잇고 있는 상황이다. 전설처럼 형성된 장쟈제의 관광지는 김의진의 숨은 노력 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한 성공에 순탄한 길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2000년대까지만 해 도 중국은 풍부한 관광자원을 갖고 있었지만 교통과 숙식 등 인프라가 상대적으로 빈약하였기에 손님들의 만족도를 높이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더구나 한국관광객 유치는 금방 기지개를 켜는 신흥시장인 만큼 규모나 파워로는 관련 인프라협력업체의 도움과 혜택이 따라 주지 못해 시장개척이 무척 어려웠다. 그러나 김의진을 대표로 하는 조선족 여행업 종사자들은 불철주야로 뛰어다니면서 손님들의 불편을 최소화하였고 눈앞에 봉착한 어려움을 풀어가면서 끝내 고지를 점령하였다. “깊은 밤중에도 항공편, 호텔, 버스 등이 차질이 생겼다는 구원요청 전 화벨소리가 울리곤 했습니다. 지금도 전화벨소리가 나면 어지간히 놀라 곤 합니다. 그때 여행업을 하던 사람들은 다 이런 후유증이 남아있습니다.” 김 회장은 베이징 본사 외에 선후로 상하이, 시안, 장쟈제, 쿤밍(昆明), 칭다오, 하이난도 등 10여 개 지사를 운영하면서 전국적인 시스템을 구 축하여 관광시장을 석권하였다. 그는 한국여행업계로부터 팸투어(여행 시장 답사 행사)의 황제로 불릴 정도로 연구와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최초로 가이드유니폼을 도입한다든지 매년 전직 원 해내외 보너스관광을 실시한다든지 하면서 여행업계의 새로운 문화 를 선도하였다. 한국관광안내 매뉴얼이 전무한 상황에서 그가 직접 만든 가이드북은 중국은 물론 한국의 경쟁업체들이 베끼고 모방하기도 했다.

지난 30여 년간 그는 100만 명이 넘는 한국관광객을 유치하는 기록을 냈다. 이런 업적은 100번도 넘는 한국출장을, 100회가 넘는 중국시장 현지답사를 열정 넘치게 뛰어다닌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의 말을 빌자면 한국관광객들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중국에서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관광을 할 수 있었으며 호텔, 차량, 식사, 관광지 등 모든 면에서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받은 유일한 외국관광객이었다고 한다. “가이드를 포함한 조선족 여행업 종사자들은 한국 손님들을 자기 가족이나 친지처럼 살뜰히 챙겨주었고 진심으로 잘 모시려고 애썼지요.” 김 회장은 조선족 여행업 종사자들은 초창기 중국의 외화 획득에도 큰 기여를 하였고 두 나라 기업들의 상호 투자, 지방단체들 간의 교류와 협력에도 크게 기여하였다고 하면서 마땅히 재평가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그때만 해도 중한 양국은 부동한 사회제도 하에서 수십 년 동안 서로 간의 왕래가 없다 보니 문화적 측면과 관습 면에서 적지 않은 충돌들이 일어났었다. 이러한 원인으로 초창기 양국의 비즈니스 교류현장에서 많은 오해와 난항을 겪기도 했다. 언어적 우세를 보인 조선족들은 서로 서툰 영어로 교류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소통이 될 수 있었다. 조선족들은 양국의 문화와 관습의 장벽을 해소하는데도 앞장섰고 산업고찰을 하는 현장에 서도 쌍방이 빠르게 이해하도록 애써왔다. 오해와 불쾌감을 되도록 줄여 주고 긍정적인 부분을 살려가면서 나름대로의 가교 역할을 해나갔다. 총체적으로 한국 기업들이 중국 시장에서 성공적인 투자와 교역을 보 장해주는데 있어 조선족들은 일익을 담당하였다.

베이징 민족사회 통합의 첫발을 내디디다

 민간단체를 결성할 필요성에 대한 이해와 운영실천도 한국과의 민간 교류 과정에서 터득하게 된 것이다.”라고 말하는 김의진은 정부를 대신 하여 지역사회에 흩어진 조선족 사회를 위해 첫발을 내디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201168, 베이징조선족기업가협회는 기업인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고고성을 울렸다. 사실 80년대 후반기부터 개혁개방에 힘입어 베이징에서 사업을 시작한 조선족 기업인들이 늘어나게 되었고 10여 년 에 걸쳐 상당한 수의 기업인 집단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베이징의 기업 인 단체가 없는 상황에서 전국적인 조선족 정경분야 포럼이나 행사에 참 가할 때면 난처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협회의 설립에 앞서 베이징의 중·청년 조선족 기업인들은 12년간 활약 해온 베이징조선족골프협회를 중심으로 서로 생각을 나누고 정보를 교 류하고 협력의 기회도 만들어 내는 정도였다. 기업인들은 골프협회보다 좀 더 포괄적이고 영향력이 있는 조직이 있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고 베이징조선족기업가연의회를 발족하는 데 대해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김 회장은 베이징에서 사업하는 기업인들과 다각적인 교류를 통해 민족사회에 큰일을 해내자면 모래와 같이 산산이 흩어진 조선족 기업체와 민간단체들이 단합되고 통합되어야 한다는 공감을 얻어냈다. 기업인들 이 선두에 서고 민간단체가 적극 동참하여 광범한 민족구성원들이 합심 된 바람직한 민족사회를 만들어가자는 목표가 설정되었다. 그는 수도의 이미지에 걸 맞는, 사회 전체를 통합할 수 있고 높은 차원의 품위를 지향할 수 있는 협회를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로 심혈을 기울였다. 그의 노력 은 빛을 보게 되었다. 베이징조선족기업가협회는 해당 기관으로부터 허 가를 받았으며 초대회장으로 김의진이 당선되었다. 협회가 설립된 그날부터 그는 기업가의 사회적인 책임감을 안고 민족사회에 대한 의무수행 을 자진하여 짊어지게 된 것이다. 베이징조선족기업가협회가 기타 지역에 비해 훨씬 늦게 설립되었지만 수도의 단체이니만큼 어딘가 달라야 한다는 것과 전국의 조선족 기업인들에게 여러 면에서 본보기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안고 태어난 단체라고 김 회장은 소개하였다. 그는 선후하여 중국조선족기업인골프협회 제2대 회장, 베이징조선족 기업가협회 초대회장, 중국조선족기업인협회 회장단 집행회장 등을 역 임하였으며 총 5회에 걸쳐 중국조선족경제포럼도 주관하면서 민간단체 의 결성 및 행사를 주도하는데 앞장섰다. 현재 이런 단체들은 조선족지역사회의 구심점이 되고 있으며 지역사회 리더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베이징의 조선족 기업가들을 보면 1980년대에 시작된 김치장사, 요식 업 등 전통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것을 위주로 하던 데로부터 근 40년의 발전을 거쳐 일정하게 자본축적이 이루어졌고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춘 경 제집단과 산업주력군으로 부상하였다. 현재 조선족 기업인들은 제조업, 부동산, 금융, 국제무역, IT, 문화 등 제반 분야로 확장되어 나름대로 성 장하고 있다. 한국과 교류가 있기 전에 조선족들은 주로 교육과 문화면에서 우위를 차지하였다면 중한 수교 이후에는 경제지위, 생활수준, 문명수준이 획기적인 비약을 이루었다 고 해도 과언이 아니 다. 조선족들은 한국 기업인들과의 접촉을 통해 비즈니스를 배우 게 되었고 국제적 시각 을 갖게 되었다. 관광 업계만 보아도 여행업 무를 대행하면서 점차 거래처를 확보하고 사 업을 확장할 수 있었으며 부를 축적하는 즐거움도 있었다. 자기의 기업을 만들 고 기업가로 성장하게 되는 과정에 한국으로부터 받은 혜택은 잊지 말아야 한다고 김 회장은 말한다.

   

민족화보기자와 인터뷰 중

  장미꽃을 건넨 손에는장미향이 남는다

 가난한 가정에서 고생하며 자랐던 김 회장은 어려운 사람들의 사정을 헤아리는 심성을 갖게 되었다. 김 회장의 인생에서 중요한 영향을 끼친 사람은 외국인으로서 최초로 중국 민정부의 최고 영예인 유자의 소수상자인 고 이관숙 선생을 꼽을 수 있다. 이관숙 선생은 의수족기술로 불행한 사람들을 치료하면서 평생 장애인 봉사에 헌신한 분이다. 김의진은 80년대 중반 재미 교포인 이관 숙 선생이 진행하는 중국 장애인 자선행사를 도우면서 처음으로 공익자 선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후에 중한 민간교류의 현장에서 이런 공익 문화를 다양하게 접하고 체험하는 기회가 많아졌다. 일찍 1990년을 전후로 하여 경영이 어렵게 된 베이징조선족학교를 위 해 적극적인 모금활동을 펼쳤으며 사례금으로 받은 돈까지 선뜻 내놓은 것을 시작으로 선행 실천은 해마다 이어지고 있다. 또한 베이징조선족 애심장학회 결성에 직접 참여하여 20년간 가정형편이 어려운 조선족 대 학생들을 지원해오고 있다. 중앙민족대학 민족교육기금회를 창설하고 운영하는 일, 옌벤대학(延边大学) 예술학원에 장학금을 지원하는 일, 창바이조선족자치현(长白朝 鮮族自治县) 압록강교육기금회 조성 및 후원에 동참하는 일, 베이징조선 족노인협회 후원회를 창설하고 운영하는 일, 베이징 및 각 지역의 조선 족 공익자선행사에 지원하는 일, 동북지역 특대 수해지역 자선모금 행사를 주도하는 일, 베이징 한국어학교를 지원하는 일, 중국 각 지역 재난지역에 지원하는 일 등 그는 항상 기부에 앞장서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불치의 병에 걸린 회사원을 위한 모금, 베이징시 조선족 운동대회와 조선족 설맞이 모임 등 동포사회의 크고 작은 연중행사에 헌금, 베이징 한국국제학교 설립에 기부 등에 그는 습관적으로 앞장서곤 하였다. 코로나 발생초기 그는 사재를 털어 한국에 3만 장의 마스크를 지원하였으며 한국에 수백 권에 달하는 도서를 기증하였다. 그의 행보는 현재도 진행형이다. 그는 갖가지 기부를 통해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남을 돕고 선행을 베풀면 자신도 성취감과 행복감을 느끼게 되면서 점차 거기에 중독이 된다는 것이다. 김 회장은 일반 자선가와는 달리 자선기부에도 앞장서지만 중요한 것 은 동포사회 공익자선문화의 선도자, 조직자로 활약하는 것이 돋보인다. 2018년 김의진은 한중 교류와 민족문화의 계승, 한민족의 화합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대통령의 표창을 받았다. 대통령상 수상식에서 그는 이렇게 소감을 발표하였다. “중국의 조선족들은 더 일찍부터 더 많은 사람들이 인정을 받고 훈장을 받아야 했습니다. 저는 그들을 대신해서 받았을 뿐입니다.”

글 / 서정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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