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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재해석(28)
외교와 인사에 능한 난세의 영웅 손권
[450호] 2021년 11월 01일 (월) 김정룡 기자 jzl0917@naver.com

손권은 손견의 둘째 아들이다. 손권은 네 형제 중에서 가장 총명하고 잘 생긴데다 용맹하고 여러 가지 재주가 뛰어나 어릴 적부터 될 성 싶은 떡잎의 면모를 나타냈다. 형 손책이 강동의 여러 군을 평정했을 때 손권은 15세 나이로 양선현(陽羨縣)의 현장이 되었다. 당시 만호 이상의 현의 우두머리를 현령(縣令)이라 하고 만호 이하의 현의 우두머리를 현장(縣長)이라 불렀다. 손권이 현장을 맡았던 양선현은 아마 만호 이하였던 모양이다. 규모가 크지 않은 현일지라도 15세 나이로 현장을 맡았으니 대단한 소년임에는 틀림없다. 물론 형의 찬스가 결정적인 이유인건 사실이겠으나 아무튼 될 성 싶은 떡잎이었다는 점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손권은 형의 찬스18세 때 영영 잃어버리게 버렸다. 건안 5(200) 형 손책이 26세 꽃나이에 죽었기 때문이다. 손책이 손권에게 물려준 재산은 오직 회계·오군·단양·예장·여릉만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이 가운데 몇몇 군은 험준한 곳으로 아직 다 복속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천하의 영웅호걸들이 각 주와 군에 퍼져 있었고 빈객으로 의탁하고 있는 선비들도 개인의 안위에 따라 자신이 가서 머물 곳을 결정했으며 군주와 신하의 두터운 관계는 없었다. 다시 말하자면 그때 손권에게는 왕으로 군림할 확실한 근거지와 정치 세력이 턱 없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진수의삼국지오주전에 의하면 손책의 후계자로 지명된 손권은 너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앞날이 막막해서 어린 아이처럼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손책은 임종 시 손권을 장소에게 맡겼다. 이것을 탁고(託孤)’라고 한다. 손책이 죽은 지 22년 후 유비가 제갈공명에게 유선을 맡긴다. 이것을 역사에서는 영안탁고라고 부른다. 유비가 영안에서 제갈공명을 불러 들여 탁고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두 탁고는 심통하게 닮았다. 손책이 장소에게 손권을 맡기면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동생이 군주의 자격이 된다면 보좌하시고 그렇지 못한다면 그대가 마음대로 하세요.”

유비가 제갈공명에게 유선을 맡길 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유선이 황제 자격이 된다면 보좌하시고 그렇지 못하면 그대가 취해도 좋소.”

마음대로 하세요.’취하도 좋소.’라는 말은 같은 뜻으로서 내가 비록 후계자로 정했지만은 만약 그가 깜냥이 못되면 그대가 대신해서 군주가 되어도 좋겠다는 의미이다.

손책과 유비가 임 종 시 신하에게 이렇게 대범하게 군주의 자리를 빼앗아도 좋다고 했지만 장소와 제갈공명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장소와 제갈공명은 모두 유생출신이며 유가에서 군주를 배신하고 역성혁명을 일으키는 것은 천하의 대죄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장소와 제갈공명이 걸은 길은 완전히 상반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장소는 손책이 죽자 하염없이 울음만 터뜨리고 있는 손권을 울음을 그치게 하고 상복을 갈아입게 하고 말에 올라 밖으로 나가 군대를 순시하도록 했다. 말에 오른 손권의 모습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군주의 위엄을 보여주기에 충분했으며 이에 따라 신하들도 주군으로 받들게 되었다.삼국지오주전 기재에 의하면 장소와 주유 등은 손권이 자신들과 함께 대업을 이룰 만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마음을 맡기고 손권에게 복종하여 섬겼다. 조조는 표를 올려 손권을 토로장군(討虜將軍)으로 임영하고 회계 태수를 겸하도록 했다. 조정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손권은 오에 주둔하면서 오군의 승을 회계군으로 보내 문서와 사무를 처리하게 했고 장소를 태사(太史), 태부의 예로 대우하고 주유와 정보(程普)와 여범 등을 지휘관으로 삼고 재능이 있는 사람들을 부르고 명망 있는 선비를 초빙했으므로 노숙과 제갈근 등이 비로소 빈객이 되었다. 이어서 손권은 부장들을 곳곳으로 보내 산월족(山越族)을 진압하고 어루만졌으며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을 토벌하였다. 이렇게 손권은 본격적으로 천하의 영웅이 되는 길에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손권에 비해 유선은 제갈공명이 죽을 때(이때 유선의 나이는 29세였음)까지 궁궐 문을 벗어나본 적이 없는 소위 가택연금상태에 있었으며 황제의 노릇과는 더욱 거리가 매우 멀었다. 왜 유선은 이렇듯 가련한 처지에 있었을까?

제갈공명은 유비가 죽자 승상으로서의 지위와 권리를 충분히 발휘하여 권력의 정점에 서 있었다. 무슨 말이냐면 승상은 국무총리에 해당되는 관직이며 한나라 초기에 마련된 자리였다. 당시는 승상에게 부()를 설치해주고 조정의 우두머리 역할을 맡겼다. 요즘 총리가 국가 정부부서인 국무원을 갖고 있고 크고 작은 일을 국무원에서 결정하고 결제하는 것과 마찬가지 시스템이었다. 유비가 삼국정립을 이루게 되자 제갈공명에게 승상의 자리를 부여하였다. 승상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에 있는 자리이다. 하지만 승상이라 하여 모두 똑 같은 권력을 갖고 있은 것은 아니었다. 승상에게는 ()’가 있어야 권력이 있는 것이고 만약 ()’가 없으면 권력도 없이 허수아비가 된다. 나관중의삼국연의를 읽어 본 독자라면 제갈량이 유비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은 인물로 여기기가 일수이지만 실제 역사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유비는 비록 제갈량을 승상으로 임명했지만 죽을 때까지 ()’를 설치해주지 않았다. ‘()’를 갖지 못한 제갈량은 말이 승상이지 실제적인 권력행사는 하지 못했다. 건안 13(208) 적벽대전 이후 유비가 죽을 때까지 제갈량의 역할은 매우 보잘 것 없었다. 유비가 죽을 때는 관우와 장비도 사망했고 법정과 방통 등 모사들도 이미 저 세상으로 떠나간 뒤였다. 믿을만한 신하로선 유일하게 제갈량만 남은 처지였다. 그래서 자신의 후계자 유선이 아직 어려서 제갈량에게 맡기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유비의 권력제한에 한에 맺혀 있던 제갈량은 유비가 죽자 기다렸다는 듯이 승상부를 설치하고 유선을 바지사장으로 앉혀놓고 나라의 크고 작은 일을 전부 자신이 취급하는 실제 황제 노릇을 했다. 결과적으로 제갈량이 살아 있을 때의 유선은 바지사장황제였다. 유선이 얼마나 제갈량에 한이 컸던지 제갈량이 죽자 유선은 승상부를 폐지하고 승상의 관직마저도 없앴다.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은 유선은 제갈량이라는 정치야망에 젖어 있은 인물을 만나 황제노릇을 수행하지 못했던 반면에 손권은 장소라는 신하를 잘 만났기 때문에 형이 죽자 곧 일인자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똑 같은 탁고에 의해 후계자가 된 손권과 유선의 하늘과 땅 차이의 운명이었던 것이다.

   

 

 외교에 뛰어난 손권

 

손권과 조조는 사돈지간이었다. 조조의 조카딸은 손권의 동생인 손광(孫匡)에게 시집갔고 조조의 아들인 조창은 손권의 조카딸을 아내로 맞이했다. 적벽대전 직후에는 손권이 여동생을 유비와 혼인시켰다. 위와 오, 오와 촉이 비록 사돈관계이지만 서로간의 전쟁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건안 5(200) 조조가 원소를 무찌른 이후 세력이 커져 북방을 차지할 수 있었고 전체 3분의 2나 되는 땅을 점하고 있었다. 조조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서서히 남쪽 동쪽을 향해 진군했다.

건안 13(208) 조조의 군대가 남쪽으로 압박해 오자 손권의 진영은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다. 손권의 세력은 조조와 아예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차이가 컸다. 마침 그때 조조가 보낸 편지 한 통이 손권에게 도착했다.

최근에 본인은 조정의 명을 받들어 죄를 지은 자들을 정벌하고 있소. 군대의 깃발이 남쪽으로 향하자 유종은 바로 손을 들어 투항했소. 이제 본인은 다시 80만 수군을 준비하여 그대와 함께 그대가 머무는 오 땅에서 사냥이나 할까하오.”

위기에 직면한 손권의 진영은 두 개 파로 나뉘었다. 장소를 비롯한 문신들은 조조에게 항복할 것을 간청했다. 이와 반대로 조조에게 굴복하지 말고 결사항전 할 것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주유와 노숙을 비롯한 주전파였다. 요즘 비유로 말하자면 장소를 비롯한 화평을 주장하는 문신들은 비둘기파, 주유와 노숙을 비롯한 항전을 주장하는 무신들은 매파였다. 손권의 최후 결정은 역시 항전이었다.

손권의 힘으로만은 조조를 대적할 수가 없었다. 마침 일차적으로 위협을 느낀 유비와 손을 잡고 공동 항전에 나서게 되었다. 유비와 손권이 손을 잡는데 제갈량과 노숙이 절대적인 공을 세워 성사되었던 것이다.

유비와 손권의 연합군은 적벽에서 조조와 최후 결전을 벌였는데 결과는 연합군의 승리, 조조는 처음으로 대참패를 맛보았다.

적벽대전의 최대 수혜자는 손권이 아니라 유비였다. 당시 손권은 근거지가 있었으나 유비에게는 엉덩이를 붙일 확실한 근거지조차 없었는데 이번 전쟁을 통해 형주를 얻게 되었다. 물론 손권이 형주를 유비에게 빌려준다는 조건이 붙긴 했지만 말이다.

건안 17(212) 10월 조조는 40만 대군을 이끌고 손권 정벌에 나섰다. 손권은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조조의 생각 밖으로 조조의 진영을 지척에 두고 시위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조조는 쉬이 공격하지 못했다. 손권의 용맹한 모습에 탄복한 조조는 이렇게 말했다.

자식을 낳으려면 손중모(孫仲謀, 손권) 정도는 돼야지.”

조조는 싸우지 않고 퇴각했다. 그 후 얼마동안 조조와 손권은 작은 갈등은 있었으나 큰 전투는 없었다.

한편 손권이 적벽대전 승리의 과실로 유비에게 빌려주었던 형주를 후일에 돌려달라고 요구하자 유비는 없던 일로 시치미를 떼는 바람에 촉과 오는 반목하여 서로 크게 싸우게 되었다.

손권이 유비라는 적을 무너뜨리려면 조조의 지원이 필요했다. 직접적인 지원이 아니더라도 삼자로 가만히 관망만 하면서 암적으로 도울 것을 요청했다. 건안 24(219) 손권은 천명이 조조에게 있다고 판단하고 신하를 자칭한다. 바로 그해 유비는 조조의 수중에서 한중을 탈취했다. 관우는 조조의 부하 우금을 나포했고 방덕을 죽였다. 이 소식이 조조에게 전해지자 조조는 멘붕에 빠졌다. 관우가 두려워 천도 논외까지 있을 정도였다. 그때 손권이 관우의 목을 베 조조에게 바치겠노라 충성을 맹세했다. 손권은 빈말을 하지 않았다. 관우의 목을 베 조조에게 전달했다.

손권은 유비와 조조 사이에서 이쪽과 손잡았다가 나중에는 등을 돌리고 저쪽과 연합하는 상황에 따라 등거리 외교전술을 펼쳤다.

손권이 관우를 죽인 것에 분노한 유비는 무리하게 손권토벌에 나섰다가 참패하고 화병에 걸려 이듬해에 죽는다.

쩍하면 감정적으로 일을 대하는 유비에 비해 손권은 매우 이성적이고 침착했다. ()나라 사람 부현(傅玄)은 손권과 손책의 다른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손책의 기풍은 총명 과감하고 혼자 결단을 내리는 것이다. 용맹이 천하를 덮을 정도이다. 반면 손권은 틈을 이용하고 때를 기다릴 줄 안다. 군대를 경솔하게 출병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전쟁을 하면 실패를 대단히 적게 한다. 강남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220년 조비가 황제에 등극하고 이듬해인 221년 유비가 촉의 황제에 등극하지만 손권은 여전히 위의 신하를 자칭하면서 황제자리에 오를 것을 거부하다가 229년에 이르러서야 황제자리에 오른다.

 

 가족 같은 정으로 정치를 펼친 손권

손권의 부하로는 아버지 손견이나 형 손책 아래에서 녹을 먹은 오랜 신하로서 정보, 황개, 장소, 주유가 있었고 손권이 스스로가 초빙 또는 발굴하거나 키운 일문들로는 노숙, 감녕, 여몽, 육손 등이 있었다.

손권은 호랑이 사냥에 정신 나간 용맹한 기백도 갖췄고 부하들을 가족처럼 대하는 정이 깊은 사나이였다.

손권의 성공은 능굴능신(能屈能伸)의 외교적인 마인드와 가족 같은 정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역사가들의 평가이다.

건안 18(213) 조조의 군대는 유수구로 물러나 있었다. 이 때 손권은 비천한 출신의 주태(周泰)를 평로장군(平虜將軍)으로 임명하여 이곳을 지키게 했다. 주태의 부장으로는 주연(朱然)과 서성(徐盛)을 임명했다. 문제는 주연과 서성이 주태에게 마음속으로 복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손권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어느 날 순시를 핑계로 주태의 군영에 들이닥쳤다. 이어 큰 연회를 열어 많은 장군들을 불러 모았다. 연회는 화기애애했다. 손권이 친히 참석하여 장군들에게 순서에 따라 술을 따랐다. 손권이 주태 앞에 이르자 갑자기 주태에게 옷을 벗으라고 했다. 무슨 일인지 참석자들이 모두 어안이 벙벙했다. 원래 주태의 몸에는 성처투성이었다. 그야말로 만신창이었다. 손권은 그 상처들이 어떻게 생긴 것인지 물었고 주태는 하나하나 설명했다. 듣고 있던 손권은 울음을 터뜨렸다.

유평, 그대가 과인의 형제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전쟁을 했구려! 그러니 과인이 어찌 그대를 형제로 여기지 않을 수 있겠소? 또 어떻게 그대에게 중책을 맡기지 않을 수 있겠소? 마음 놓고 행하시오. 출신이 비천하다고 주저하지 마시오. 과인이 그대와 슬픔도 기쁨도 함께 할 테요. 영욕도 같이 하겠소.”

이에 주연과 서성 뿐 아니라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주태에게 수하의 예를 갖추지 않을 수 없었다.

제갈량의 형 제갈근이 이릉전쟁 직전 유비에게 편지를 써서 철군을 권유했다. 이에 일부 사람들이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제갈근이 적과 내통한다는 소문을 낸 것이다. 가장 난감해진 것은 육손이었다. 육손이 손권에게 오해를 풀어달라는 요청의 편지를 보냈다.

손권이 말했다.

과인과 자유(제갈근)는 여러 해 일을 같이 해 가족의 은혜를 느끼는 사이요. 아울러 과인과 자유는 서로 배반하지 않는다는 생사불변의 맹세를 했소.”

손권은 이렇게 정으로 수많은 인재를 모았다.

손권의 사신으로 위나라에 간 조자(趙咨)가 위나라 조비를 만났다. 조비가 조자와 대화를 나눠보고 인재라고 느껴 물었다.

당신의 오나라에는 귀하 같은 인재가 얼마나 있소이까?”

특별히 똑똑한 사람은 80~90명 있습니다. 그러나 신과 같은 사람은 수레에 실어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손권은 이 많은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잘 활용하여 나라를 운영하였다. 제갈량도 손권의 용인술을 내심으로 인정했다.

동오와 반목해서는 안 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곳에는 현명한 인재들이 많으며 장군과 재상들이 화목하다.”

   

 

 

 

노인치매로 비참했던 최후를 맞은 손권

이렇듯 잘 나가던 손권도 노년에 치매에 걸려 왕족암투와 조정 분열에 휩싸여 바참한 최후를 맞게 되었다.

우선 아버지가 아들을 살해했다(손권이 손패를 살해). 형이 동생을 죽였다(손휴가 손량을 살해). 조카가 숙부를 살해했다(손호가 손분을 살해). 종친이 황족을 죽였다(손준이 손화를 살해). 완전히 골육상쟁이었다.

다음 손권은 이상하게도 까닭 없이 주위의 신료들을 시기하기 시작하더니 모두들 놀라고 겁이 나 벌벌 떨었다. 시도 때도 없이 화를 내곤 하였다.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급기야 손권은 작은 아버지로 모시던 장소를 죽게 만들었다. 손권의 창업에 공이 큰 육손마저 비명으로 죽었다.

그러나 손권의 수명은 장수했다. 손권의 수명이 71세로 가장 길었고 다음은 66세였던 조조, 그 다음이 58세였던 유비이다. 삼국시대 세 정권 중에서 손오의 국운이 51년으로 가장 길었다. 조위 46, 촉한이 42년이었다.

김 정 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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