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페이지로|[ 21.11.29(월) 구인고충상담기사제보신문지면보기
신문사소개 | 구독신청아이디/비밀번호
> 뉴스 > 칼럼/사설 > 특별연재
     
<삼국지> 재해석(27)
27. 오나라 창건자 손책
[449호] 2021년 10월 16일 (토) 김정룡 기자 jzl0917@naver.com

손책의 아버지 손견은 강동의 출신이긴 하지만 주로 강서 지역에서 원술의 부하로 활동했을 뿐 강동에서는 영향력을 보이지 못했다. 오나라의 실제 창건자는 손책이다.

   

초평(初平) 3(192) 손견이 죽자 장남인 손책이 그 뒤를 이었다.

손책은 아버지 손견이 살아 있을 때 주유(周瑜)와 서로 우정을 맺고 사대부들을 모으자 장강과 회수 사이의 사람은 모두 그를 향해 세력이 커지기 시작했다. 아버지 손견이 갑자기 죽자 손책은 장강을 건너 강도현(江都縣)에서 살았다.

10대 후반 소년 손책은 자기 세력이 아직 미미해 외숙인 단양태수 오경에게 의지했다. 하지만 오경은 지방 호족에 불과하기 때문에 흥평(興平) 원년(194) 명문권세가인 원소의 동생 원술을 따랐다.

원술과 손견은 각별한 사이였다. 손견이 동탁을 토벌할 때 궁정 우물에서 전국 국새를 발견하고 간직하고 있다가 손책이 그것을 원술에게 넘기고 병사 수백 명을 빌렸다고 하는데 이것은 완전히 뻥이다. 즉 나관중 소설삼국연의가 지어낸 허구 스토리이다. 원술이 손책에게 병사 수백 명을 준 것은 손견이 동탁을 물리쳐 궁정에서 내쫓은 공로가 크고 특히 원술이 손견 살아 생전에 많이 아꼈던 부하였고 또 손책이 장래가 싹수가 보인 열혈 청년이기 때문에 손견이 이끌던 부대를 아들인 손책에게 되돌려 주었던 것이다. 진수의삼국지에서는 원술과 손책의 관계를 이렇게 기록했다.

원술은 그를 각별하게 여겨 손견의 부대를 그에게 돌려주었다. 태부 마일제(馬日磾)는 절()을 지니고 관동을 위로하고 수춘에서 예의로서 손책을 초빙하고 표를 올려 회의교위(懷義校尉, 정벌을 담당한 관직)로 임명했다. 원술의 대장 교유(喬㽔)와 장훈(張勳)은 모두 마음을 기울여 손책을 존경했다.”

원술은 손책을 보며 늘 감탄하여 이렇게 말했다.

만일 내 자식이 손랑(孫郞)과 같다면 죽은들 또 무엇을 한하랴!”

원술은 이렇듯 손책을 신임하고 있었다. 그런데 손책의 기병이 죄를 짓고 원술의 진영으로 도망쳐 들어가 마구간에 숨었다. 손책은 사람을 시켜 쫓아가 그를 죽이라고 하고 일을 끝낸 뒤 원술을 찾아가 사죄했다. 이에 원술이 말했다.

병사들은 반란을 좋아하지, 우리는 당연히 함께 그들을 증오해야 하거늘 무엇 때문에 사죄하시오?”

이때부터 군 안에서는 점점 더 손책을 두려워하고 존경하게 되었다.

원술과 손책 사이 좋았던 관계가 금이 가고 급기야 결별하게 된 것에는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원술은 서주(徐州)를 치려고 여강태수(廬江太守) 육강(陸康)에게 쌀 3만 섬을 요구했으나 육강은 이를 거절했다. 육강은 배짱이 세고 오만했던 모양이다. 어느 한 번 손책이 만나러 갔는데 아예 만나주지도 않았다. 원술과 손책, 두 사람은 모두 육강에 화가 나 있었다. 원술은 손책의 손을 빌어 육강을 제거하려했다.

전에 전기를 임용했지만 언제나 원래 의도가 실현되지 못함을 한스러워했소. 지금 만일 육강을 잡는다면 여강은 진정 그대의 소유가 될 것이오.”

손책이 출병하여 원술의 뜻대로 육강을 제거했다. 그런데 원술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옛 부하였던 유훈을 여강태수로 삼았다.

강호(江湖) 세계에서는 믿음이 곧 생명이다. 믿음이 없으면, 혹은 믿음을 저버리면 배신당하기 마련이고 결과는 좋지 못하다.

원술은 손책에게 믿음을 잃은 데다 스스로 황제를 참칭하여 세상의 비웃을 샀다. 이 사건은 그와 손책 사이를 완전히 파탄 나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허영에 들떠 있는 원술과 실사구시적인 손책, 성격이 완전히 상반되는 두 사람은 더는 공생 공존할 수가 없었다.

   

삼국지저자 진수는 손책을 이렇게 평했다.

용모가 수려하고 우스갯소리를 좋아하며 성격이 활달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잘 듣고 사람을 기용하는 데 탁월했다. 그러므로 선비나 백성은 그를 만나기만 하면 마음을 다하지 않는 이가 없고 기꺼이 그를 위해서 죽었다.”

조조도 손책을 인간적으로 내심 좋아했고 표를 올려 토역장군(討逆將軍)으로 삼고 오후(吳侯)로 봉했다. 여기서 잠깐 역사상식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에 관해 설명해 보련다.

()’는 주나라 초기 봉토건국(封土建國) 즉 이른바 봉건제도가 실시되었는데 천자로부터 땅을 분봉 받아 그 땅에서 우두머리 역할을 하는 사람의 직합이 바로 ()’라 불렀다. 제후(諸侯)는 이러한 ()’들이 많다는 뜻이다. 당시 제후는 한 나라의 국왕이었다. 그런데 이들을 왕이라 부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천자를 왕(주나라 왕, 周王)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황제라는 존칭은 진시황이 지어낸 것이기 때문에 주나라 때는 없었다. 그렇다면 제후들을 어떻게 호칭했을까? ()이라 불렀다. 이를테면 제환공, 진목공, 송양공 등등이다. 그런데 유일하게 초나라만 왕이라 불렀다. 춘추오패 한 명이었던 초장왕(楚庄王)이 바로 그 예이다. ? 초나라만 예외였을까? 역사가들의 해석에 의하면 초나라는 당시 남방에 위치해 있어 중원 문명의 변두리에 속했기 때문에 천자의 직접적인 영향을 덜 받았던 것이고 그래서 중원 사람들은 초나라를 야만세상으로 여겼던 것이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말하자면 조조가 손책을 오후(吳侯)’로 봉했다는 것은 지방정권의 우두머리로 인정했다는 의미이다.

손책이 오나라에서 한참 세력을 확대하고 있을 때 중앙에 속해 있던 선비들의 보스인 원소가 강성해져 조조와 양강을 이루게 되었고 둘 중 한 사람은 사라져야 할 역사의 운명을 맞고 있었다. 원소에 비해 세력이 약했던 조조는 손책과 손을 잡아야 했다. 그래서 조조는 그의 딸을 손책의 동생 손광에게 시집보내고 그의 아들 조창을 손분(손책의 사촌 형)의 딸과 결혼시켰으며 손책의 동생 손권과 손익을 모두 예로 초빙하고 또 양주 자사 엄상에게 명하여 손권을 무재(茂才, 본래 수재였는데 동한을 세운 황제의 이름이 劉秀여서 같은 글자를 기피하는 풍습에 의해 수재를 무재로 불렀음)로 추천했다.

그러나 손책은 조조의 호의를 무시하고 자신의 야심이 따로 있었고 그 야심에 불타 있었다.

건안 5(200) 조조와 원소가 관도에서 대판 싸움을 벌였다. 이 전투는 삼국시대 삼대전정 중 하나였고 첫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패한 자는 역사무대에서 사라져야 하고 승자는 미래의 주인이 되는 판가름을 가늠하는 전쟁이었다. 손책은 이 틈을 노리고 은밀히 허도(許都, 황제가 있는 곳)를 습격하여 한나라 헌제를 맞이하려고 했다. 그는 비밀리에 군대를 조직하고 장수들에게도 임무를 분담시켰다. 그런데 그는 출발하기도 전에 예전에 오군태수를 지낸 허공(許貢)의 문객에게 살해되었다. 이보다 앞서 손책이 허공을 죽이자 허공의 작은 아들과 문객은 장강 가로 달아나 숨었다. 순책이 혼자 말을 달려 나갔다가 갑자기 허공의 문객과 마주쳤는데 그 문객이 손책을 쳐서 상해를 입혔다. 상처가 매우 심해 생명이 경각에 이르렀다.

인간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마지막 말을 남긴다. 우리는 그 말을 유언이라고 부른다. 위대한 인물일수록 그 유언이 거창하고 장대하기 마련이다.

손책은 죽음을 앞두고 장소 등 측근을 불러놓고 어떤 유언을 남겼는지? 알아보자.

중원 지역은 지금 혼란에 빠져 있으나 오와 월의 무리와 삼강(三江)의 견고함에 의지한다면 충분히 성패를 볼 수 있을 것이오. 여러 분은 내 동생을 잘 도와주십시오!”

손책은 자신의 후계자인 손권을 불러 인수(印綬)를 차게 하고 말했다.

강동의 병력을 이끌고 가서 양쪽 군대가 대치하는 사이에 기회를 보아 결단하여 천하의 영웅들과 다투며 충돌하는 것에 관한 한 그대는 나만 못하지만 현인을 선발하고 능력 있는 자를 임용하며 그들이 각자 마음을 다하도록 하여 강동을 지키는 것은 내가 그대만 못하오.”

이 대목에서 유비가 죽음을 앞두고 제갈량을 불러놓고 유선을 맡기면서 했던 말이 기억난다.

선생의 재능은 조비의 열 배입니다. 나라를 태평하게 안정시키고 대업을 이루기에 충분합니다. 그래서 선생을 불러 향후 일처리를 의논하는 것입니다. 만약 유선이 그럭저럭 괜찮으면 그를 보좌해주십시오. 그러나 그 아이가 장래성이 없다면 선생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해도 무방합니다.”

유비의 말뜻을 듣기 쉽게 까놓고 말하자면 유선이 황제감이면 그를 보좌하고 만약 황제감이 못되면 당신이 그를 대신해도 된다는 것이다. 역사에서는 이 유언을 영안탁고(永安託孤)’라 부른다. 그런데 이 사건은 유비가 처음 한 것이 아니고 손책의 탁고를 베껴다 사용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역사가들의 시각이다.

유비한테 제갈량이라는 모사가 있었다면 손책에게는 장소라는 뛰어난 모사가 있었다. 손책이 장소를 불러 손권을 맡기면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손중모(손권)가 큰일을 할 수 없는 재목이라면 선생이 바로 그를 대신하십시오.”

유비의 탁고와 손책의 탁고가 심통하게 닮았다. 그런데 시간적으로 손책의 탁고가 앞섰으니 유비의 탁고가 손책의 탁고를 컨닝했다는 설이 있을 수밖에!

하지만 주군한테서 탁고를 의뢰받은 제갈량과 장소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걸었다.

제갈량은 야심이 장소보다 훨씬 컸다. 황제 아닌 황제노릇을 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제갈량은 유비가 죽자 후계자인 유선을 10여 년 동안 궁궐에 감금하다시피 했다. 제갈량이 죽을 때 유선이 29세였는데 그때까지 단 한 번도 궁궐을 벗어나 바깥 구경 한 번 못했다. 20대 열혈청년이 감옥 같은, 심하게 말하면 지옥이나 다름없는 궁에 처박혀 있었으니 자유를 운운할 가치가 없이 아예 폐인이아 다름없었다. 황제인 유선은 국정을 맡으려 해도 제갈량은 아예 틈을 주지 않았다. 나라의 대소사 일체를 전부 제갈량이 맡아 처리했다. 제갈량이 얼마나 유선을 견제하고 허수아비 황제로 만들었으면, 거꾸로 유선이 제갈량한테 쌓인 한이 얼마나 심각했으면 제갈량이 죽자 유선은 승상부(丞相府)를 폐지했을까?

   

손권은 유선에 비해 운이 좋았다. 장소라는 인물은 주군한테서 탁고를 받아 제갈량처럼 독단적으로 권력을 독점할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고 손권의 권위를 세우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 상황을 복기해보면 이렇다.

형 손책이 죽자 손권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마치 하늘땅이라도 무너진 것처럼 슬퍼했고 그 슬픔에서 좀처럼 헤어 나오지 못했다.

장소가 나서 말했다.

효렴, 지금이 어찌 울고만 있을 때입니까? 더구나 주공이 상례를 세웠으나 아들 백금이 따르지 않은 것은 아버지를 거스르려 해서가 아니라 그때 어쩔 수 없이 상례를 시행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지금 사악한 자들이 서로 각축을 벌이고 시랑 같은 자들이 길에 가득 차 있는데 오히려 가까이 있는 자(손책)를 애도하려고 상례의 규정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이는 문을 열고 강도를 불러들이는 것과 같을 뿐 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빨리 기운을 차리고 큰일을 도모하십시오.”

장소는 말을 마치고 문무백관을 모아놓고 그 앞에서 손권을 말에 태우고 군주의 위엄을 과시하게 했다. 이때부터 손권은 직접 정사를 맡아 보았다.

 김 정 룡

김정룡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 동포타운신문(http://www.dongpotown.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전체기사의견(0)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전체기사의견(0)
sk텔레콤
< ahref=http://www.kqci.kr>
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152-800 서울시 구로구 가리봉동 122-19 정풍빌딩 3층 | Tel 02-837-4470 | Fax 02-837-4407
Copyright 2009 동포타운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ongpotown@daum.net
동포타운신문을 통해 제공되는 모든 콘텐츠(기사 및 사진)는 무단 사용, 복사, 배포시 저작권법에 저해되며,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