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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재해석(21)
제갈량과 삼고초려의 진실(2)
[443호] 2021년 07월 16일 (금) 김정룡 기자 jzl0917@naver.com

   

제갈량의 직책과 실권

 제갈량은 적벽대전 이전에는 아무런 직책이 없었다가 적벽대전을 계기로 구체적으로 직책을 맡기 시작했고 아울러 꽃길을 타고 승승장구했다.

적벽대전의 최대 수혜자는 유비였다. 알거지였던 유비는 드디어 근거지를 마련할 수 있었다. 유비는 마침내 강남을 되찾고 제갈량을 군사중랑장(軍事中郞將, 촉나라의 관직으로 군()을 다스리고 세금을 거둬 군수물자를 충실히 하는 일을 담당하는 직책)으로 삼아 영릉, 계양, 장사, 세 군을 다스리게 했으며 그 부세를 조달하여 군수물자를 충실하게 했다.

간안 16(211) 유비가 성도를 평정하자 제갈량을 군사장군으로 삼아 좌장군부사(左將軍府事)를 대리토록 했다. 유비가 출정할 때 제갈량은 늘 성도에 남아 지키면서 식량과 군수물자를 충분하게 했다.

건안 26(221) 유비는 황제가 되었고 제갈량을 승상으로 임명했다. 사실상 이때에 이르러서야 제2인자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한나라 초기에 승상이란 관직이 있었고 승상에게 부()를 설치해주어 황권과 분리하여 나라의 실무를 통치하는 권력 중심부 역할을 맡았다. 후한에 이르러 이 제도가 사라졌다가 유비가 부활시켰다. 그런데 제갈량은 승상이 되었으나 유비는 그에게 부()를 설치해주지 않았다. 이것은 유비가 제갈량에게 승상으로서의 확실한 제2인자 역할을 맡기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장무 3(223) 한평생 한실 부흥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유비는 세상을 떴다. 그는 임종 전에 제갈량에게 탁고(託孤, 미성년 자식을 남에게 맡기는 것)한다.

당신 재능은 조비의 열 배는 되니 틀림없이 나라를 안정시키고 끝내는 큰일을 이룰 것이오. 만일 후계자가 보좌할 만한 사람이면 그를 보좌하고 그가 재능이 없다면 당신이 스스로 취하시오.”

여기서 후계자는 유비의 뒤를 이어 황제에 등극할 태자 유선이다. 만약 유선이 황제의 재목이면 그를 보좌하고 그런 재목이 안 된다고 판단되면 당신이 그를 폐하고 황제 자리에 올라도 괜찮다는 뜻이다. 학계에서는 유비가 제갈량에게 탁고한 이 문구에 대해 논쟁이 많다. 제갈량에 대한 유비의 신임이 무한하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 말은 이렇게 해도 실제로 정말 제갈량이 유선을 폐하고 황제로 등극한다면 유교적인 선비의 모델인 제갈량이 죽었다 깨도 그렇게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믿음의 차원에서 보기 좋게 듣기 좋게 했다는 것, ‘당신이 이제부터 실권을 행사 하세요.’라는 부탁이라는 것 등등의 견해들이다.

유비는 또 유선에게 조서를 내려 말했다.

너는 승상과 함께 나라를 다스리고 그를 아버지 같이 섬겨라.”

황제가 신하를 아버지처럼 섬긴다? 글쎄요!

진수는 이렇게 기록했다.

나랏일은 크든 작든 가리지 않고 모두 제갈량이 결정했다.”

이쯤 되면 제갈량은 명목상 신하이지 사실상 촉나라 통치자였다.

   

  정치는 뛰어났지만 군사는 낙제였던 제갈량

  진수는 제갈량의 정치 능력을 이렇게 총평했다.

세상 다스리는 이치를 꿰뚫은 불세출의 정치가

진수의 다음 기록을 보면 제갈량이 얼마나 정치가로 뛰어났는지를 알 수 있다.

유비가 죽자 뒤를 이은 유선이 어리고 약하므로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모두 제갈량이 결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밖으로는 동오와 동맹을 맺고 안으로는 남월(南越)을 평정했으며 법령을 세우고 제도를 폈으며 군대를 정비하고 기계나 기술은 정묘한 수준까지 이르기를 추구했다. 법령이 엄격하고 분명하며 상을 주고 벌을 주는 것은 반드시 타당성이 있어 악한 일은 반드시 징계하고 착한 일은 꼭 표창했다. 관리로는 간교한 사람을 용납하지 않았고 사람들은 스스로 힘쓰며 길에 떨어져 있는 것을 줍지 않고 강자가 약자를 침해하지 않으므로 사회 기풍이 숙연해졌다.”

제갈량은 유생의 선비모델이었으나 나라를 통치함에 있어서 법가사상을 따랐다. 법가의 대표자인 한비가 상과 벌을 확실하게 할 것을 주장하였고 이것이 군주의 성패의 관건이라고 했다. 제갈량은 한비의 이 통치술에 도취해 있었던 것 같다.

건흥 6(228) 봄 제갈량이 병사들을 이끌고 기산을 쳤는데 그 대오가 정연하고 상을 주고 벌을 주는 것이 엄격하며 호령이 분명했다. 남안, 천수, 안정 세 군이 위나라를 배반하고 제갈량에게 호응하자 관중이 진동했다. 위나라 명제가 서쪽으로 가서 장안을 지키고 장합에게 명하여 제갈량을 막도록 했다. 제갈량은 마속(馬謖)에게 군사를 지휘하여 맨 앞에 서서 가정(街亭)에서 장합과 싸우도록 했다. 마속은 제갈량의 지시를 어기고 군사행동 중에 잘못을 범하여 장합에게 크게 졌다. 제갈량은 서현(西縣)1천여 가구를 함락시키고 한중으로 돌아와 마속을 죽여 병사들에게 사죄했다.

제갈량은 확실히 원칙주의자였다.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병가의 상식인데 아끼던 부하를 죽이기까지 했으니 너무 한 것 아닌가? 이런 의구심이 들 정도이다. 나관중은 제갈량이 마속을 죽인 사건을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읍참마속(泣斬馬謖)이라는 고사성어를 지어냈다. 하여튼 나관중은 천재적인 문학가이다.

그리고 제갈량이 통치한 촉은 길가에 떨어져 있는 것을 줍지 않았다.’는 것은 실로 태평성세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말을 독자들은 어디서 많이 들어본 얘기일 것이다. 바로 요순시대의 태평성세를 표현한 말에서 유래된 것이니 제갈량은 위대한 정치가임에는 틀림없다.

제갈량이 훌륭한 정치가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군사능력은 많이 부족했던 것 같다.

이 대목에서 역시 가장 설득력이 있고 신빙성이 있는 진수의 기록을 살펴보자.

이때 제갈량의 숙원은 나아가서는 용이 날아오르고 호랑이가 주시하는 것처럼 천하를 통일하는 것이었고 물러나서는 변방을 위협하여 천하를 요동시키는 것이었다. 또 자신이 죽은 뒤에 중원을 짓밟을 수 있고 위나라에 대항하는 자가 없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용병을 멈추지 않고 여러 차례 그의 무력을 과시했다.”

천하평정이라는 큰 꿈을 안고 5차례 북벌 원정에 나선 제갈량은 결국 모두 실패로 막을 내렸다. 왜 실패할 수밖에 없었을까? 또 진수의 말을 들어보자.

제갈량의 재능은 군대를 통치하는 데는 뛰어났지만 기이한 계책이라는 점에서는 열등했으며 백성을 다스리는 재간이 군사를 지휘하는 재능보다 나았다. 그와 맞서 싸운 사람 가운데 어떤 이는 당대의 걸출한 인물이었고 게다가 병력의 많고 적음도 서로 같지 않았으며 나아가 치는 것과 지키는 것 두 가지 일이 있으므로 비록 해마다 출정했을지라도 이길 수는 없었다.”

김정룡‘多가치포럼’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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