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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재해석(21)
제갈량과 삼고초려의 진실(1)
[442호] 2021년 07월 01일 (목) 김정룡 기자 jzl0917@naver.com

삼국연의에 수많은 영웅호걸이 등장하는데 본산지인 중국에서는 관우가 가장 인기가 높고, 일본에서는 조운(조자량)을 가장 선호하고, 한국에서는 제갈량을 가장 좋아한다. 중국에서 관우가 인기 높은 이유는 그가 신의의 아이콘이기 때문이고, 일본에서 조운을 선호하는 것은 그가 무사의 기질 아이콘이기 때문이고, 한국에서 제갈량을 가장 좋아하는 것은 그가 선비의 모습 아이콘이기 때문이다.

   

중국과 일본에서 삼국시대 인물 중 가장 좋아하는 인물이 한국과 다르지만 가령 그 시대 가장 완벽하고 위대한 인물을 꼽으라면 역시 제갈량이 1위를 차지할 것이다.

제갈량은 과연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그토록 완벽하고 위대한 인물이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결코 완벽하고 위대한 인물이 아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제갈량의 마치 신처럼 완벽함과 위대함은 모두 나관중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일 뿐이다. <삼국연의>가 그려낸 제갈량은 막사 안에서 계략을 짜 천 리 밖에서 승리를 결정지을 뿐 아니라 신묘한 지략과 계책으로 다쳐올 일까지 미리 알 정도이다. 어떠한 사람도 그의 신묘한 계책대로 따라 한다면 싸워서 이기지 못하는 경우가 없고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지 못하는 경우가 없을 것이다. 유비 집단의 관우, 장비, 조운 등 명장들도 그의 손바닥에 놀아나는 인형처럼 명령을 이해하든 그렇지 못하든 그대로 따를 뿐이다. 나관중은 제갈량의 이런 완벽함과 위대함을 뒷받침하기 위해 신야(新野)에 불을 지른 이야기, 풀배로 10만 개의 화살을 구한 이야기는 지어낸 것이다. 박망(博望)에서 불을 놓은 것은 유비이지 제갈량이 아니고, 적벽에 불을 놓은 것은 주유의 부장 황개이지 제갈량이 아니었다. 제갈량이 목욕재계하고 도사의 옷을 입고 맨발에 머리를 풀어 헤치고 제단에 올라 바람에 제사를 지낸 것은 황당한 허구일 뿐이다. ‘동풍을 빌렸다는 것도 민간전설에 의하면 주유이지 제갈량이 아니다. 사마의가 25천의 병력으로 제갈량의 25백의 병력을 포위했는데 제갈량의 공성계(空城計)에 속아 공격을 포기하고 돌아갔다는 이야기도 말 그대로 소설이다.

역사적인 제갈량은 유비가 출정할 때마다 후방에서 군수물자를 충분하게 공급하는 일을 맡았을 뿐 유비의 곁에서 계책을 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유비의 군사적인 모사 역할을 방통과 법정이 맡았다. 소설처럼 제갈량이 그토록 군사에 뛰어난 인물이고 귀신 같이 교묘한 계책을 내는 사람이라면 왜 유비가 촉 땅에만 웅크리고 있게 만들었을까? 또 왜 유비가 죽은 후 제갈량이 직접 나선 다섯 차례 북벌이 모두 실패했겠는가?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일을 나관중이 그럴듯하게 지어냈던 것이고 <삼국연의>의 영향에 의해 제갈량은 독자들에게 신과 같은 존재로 각인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적인 제갈량은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 간략하게 표현하자면 제갈량은 정치에는 뛰어났으나 군사에는 재능이 없어 반쪽짜리인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제갈량과 삼고초려의 진실

 

 제갈량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재능과 영웅다운 기개를 지녔고 키는 8척이며 용모는 매우 위엄이 있으므로 그때 사람들은 그를 범상치 않은 인물로 평가했다.

유비가 제갈량을 알게 된 것은 서서의 소개에 의해서였다.

서서가 말했다.

제갈공명은 와룡입니다. 장군께서는 혹시 그를 만나보고 싶습니까?”

유비가 말했다.

당신이 그를 데리고 함께 오십시오.”

서서가 말했다.

이 사람은 가서 볼 수는 있어도 억지로 오게 할 수는 없습니다. 장군께서 몸을 굽혀 수레로 찾아가야만 합니다.”

이리하여 유비가 마침내 제갈량에게 이르렀는데 세 차례나 찾아간 뒤에야 비로소 만날 수 있었다.

이 스토리는 진수의 <삼국지> 제갈량전에 있는 기록이다. 진수는 비교적 정직한 역사가로 평가 받고 있기 때문에 이 스토리가 신빙성이 있다고 믿어도 좋을 듯하다. 즉 유비가 제갈량을 세 번 만에야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 사실인 듯하다.

이 스토리를 역사에서는 삼고초려라고 하는데 현시대까지도 보스가 인재를 모시기 위해 몸을 낮추고 깍듯이 대하는 미담으로 전해오고 있다. 그런데 과연 제갈량이 당시 숨어 은둔하고만 있던 인재였나? 그가 진정한 선비라면 먼저 천하의 걱정을 먼저 걱정하고 천하의 근심을 먼저 근심하는 선비정신을 지니고 있었을 텐데 한가하게 앉아서 몸값이나 부풀리면서 누가 찾아올 때까지 폼이나 잡고 있었다는 것이 진실일까?

일설에 의하면 제갈량은 유비를 고향에서 만나기에 앞서 전해에 이미 두 사람이 미팅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유비가 부하들과 한참 천하를 걱정하는 회의를 하고 있었고 그 장소를 제갈량이 찾아다갔다는 것이다. 제갈량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유비는 그를 의식하지도 않았고 자기 볼 일이나 보는 태도로 제갈량을 냉담하게 대했던 모양이다. 제갈량은 인내심 있게 회의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유비와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유비가 먼저 제갈량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거꾸로 제갈량이 먼저 유비를 찾아갔던 것이다. 필자는 제갈량의 이 행위가 선비의 정신에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선비라면 천하를 걱정하고 근심하는 우환의식을 갖고 직접 실행에 옮기는 것이 마땅한 처사이기 때문이다.

유비가 제갈량을 찾아가 세 번 만에 만나 나눈 이야기도 반드시 유비가 제갈량에게 보좌해달라고 거듭 요청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유비가 당시 혼란한 정세에 대한 수습책을 제갈량에게 자문을 구했을 수도 있다.

문제는 나관중이 사서의 간략한 기록을 근거로 그럴듯하게 제갈량을 아주 위대한 인물로 포장하고 유비가 그를 모시기 위해 체면을 무릅쓰고 삼고초려했다는 아주 기가 막힌 이야기를 지어내 후대 독자들에게 제갈량에 대한 이미지를 확실하게 각인시켰던 것이다.

어찌 되었든 유비가 세 번이나 찾아간 뒤에야 만나주었다든가,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누구를 먼저 찾아갔다는 논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유비가 제갈량을 인재로 모신 후에 제갈량이 유비의 진영에서 어떤 직책을 맡았고 어떤 역할을 했는가가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된다.

유비와 제갈량이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나서 서로 뜻이 같아 의기투합하기로 했다.

이로부터 유비는 제갈량과 나날이 정이 깊어졌다.”

진수는 이렇게 짤막한 한 마디만 남겼을 뿐 제갈량이 도대체 무슨 직책을 맡았는지에 대해선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유비가 제갈량을 깍듯이 대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광우와 장비가 기뻐하지 않으므로 우비는 그들에게 설명하며 말했다.

나에게 공명이 있는 것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소. 원컨대 그대들은 다시는 왈가왈부하지 말아주오.”

관우와 장비는 더 이상 논의를 하지 않았다고 진수는 기록하고 있다.

관우와 장비 외에도 유비에게 거액의 정치자금을 대준 미축, 유비의 비서실장손건, 유비의 세객인 간옹 등 모두 제갈량보다 서열이 높았다.

제갈량이 유비 진영에 가담한 것은 건안 12(207)이었고 당시에는 구체적으로 하는 일이 없이 한가했던 모양이다. 아래의 이야기를 보면 당시 제갈량이 어떤 위치였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유표의 장남 유기도 제갈량을 매우 중요시했다. 유표는 후처의 말을 듣고 차남 유종을 사랑하고 유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유기는 늘 제갈량과 더불어 자신을 안전하게 할 방법을 상의하려 했지만 제갈량은 번번이 그것을 거절하고 함께 계획을 꾀하지 않았다. 그래서 유기는 제갈량을 데리고 후원을 구경하며 거닐다가 함께 높은 누각에 올라 연회를 여는 사이에 사람들에게 사다리를 치우도록 하고는 기회를 틈타 제갈량에게 말했다.

오늘 위로는 하늘에 닿지 않고 아래로는 땅에 닿지 않습니다. 말은 당신 입에서 나와 내 귀로 들어올 뿐입니다. 그러니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제갈량이 대답하여 말했다.

당신은 신생(申生, 춘추시대 나라 태자)이 나라 안에 있다가 위험에 처하고 중이(重耳)가 나라 밖에 있어서 안전한 것을 보지 못했습니까?”

유기는 마음속으로 그 뜻을 깨닫고 수도 밖으로 나갈 계획을 은밀히 세웠다. 마침 강하 태수 황조가 죽었으므로 그 자리에 올랐다.

이 이야기도 진수가 기록한 것이니 믿어도 좋을 것 같다. 만약 제갈량이 유비의 진영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중대한 임무를 수행하였다면 유표의 아들 유기와 한가하게 시간을 보낼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하나의 가능성은 제갈량의 삼촌 제갈현이 형주목 유표에게 의탁한 적이 있고 삼촌이 죽자 함께 따라다니던 제갈량이 고향에 돌아와 밭을 갈고 살았던 것이다. 제갈량이 삼촌 따라 유표 밑에서 생활했을 때 아마 유기와 가깝게 지냈던 것 같다. 그 인연으로 유기가 제갈량을 그다지 어려워하지 않고 사다리를 치울 정도로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였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장차 웅대한 꿈을 안고 유비와 손잡고 천하를 도모하려는 큰 일 할 사람이 유기와 이런 에피소드가 있었다는 것은 뭘 말해주는가? 유비의 진영에 가담한 직후 그때의 제갈량은 아직 중임이 없었다는 결론이다.

   
 

 

 

유비와 손권의 동맹을 이뤄낸 제갈량

 

제갈량은 삼촌 제갈현 따라 유표의 밑에 있었고 유표의 아들 유기와도 가깝게 지냈으니 당연히 제갈량은 유표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유표는 제갈량의 처가 친척이 되는 사람이기 때문에 진즉에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 유표는 지리적으로 중요하고 익주와 더불어 인구가 가장 많고 범위가 가장 큰 형주의 주목으로서 세력이 상당했다. 또 형주는 전략요충지이기도 해서 강호의 영웅호걸들이 서로 탐낼 만큼 중요했다. 유비는 유표에 비해 아주 보잘 것 없는 알거지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왜 제갈량은 유표를 도와 천하를 도모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그 쉬운 길을 버리고 어려운 길인 유비를 선택하여 천하를 도모하려 했을까? 유표는 실세는 맞지만 우유부단한 성격에 천하를 도모하려는 꿈이 없었다. 이에 비해 유비는 비록 가진 것 없지만 영웅의 기질을 갖추었고 한실(漢實) 부흥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그 모습이 제갈량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이다.

유비와 제갈량이 손잡은 것은 적벽대전이 터질 바로 전해(207)였다. 조조는 유비를 아예 싹 채로 없애버리려고 남쪽 정벌에 나서게 되었다. 조조의 세력을 도무지 당할 길이 없는 유비 측은 동오의 손권과 동맹을 맺고 공동으로 조조를 대항하는 외에 다른 선택이 없었다.

그러나 손권은 군대를 모아 시상(柴桑)에 있으면서 싸움의 성패를 관망하고 있었다.

제갈량이 손권을 찾아가서 말했다.

천하가 혼란스러워지자 장군께서는 병사를 일으켜 강동을 점거하게 되었고 유예주(유비)도 한수 남쪽에서 군대를 모아 조조와 천하를 다투고 있습니다. 지금 조조는 큰 혼란을 끊어 거의 평정을 끝내고 형주를 깨뜨려 천하에 위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영웅이 무력을 쓸 땅이 없으므로 유예주께서는 이곳까지 달려왔습니다. 장군께서는 역량을 헤아리고 이 사태에 대처하셔야 합니다. 만일 오와 월의 병력으로 중원과 맞설 수 있다면 곧바로 국교를 끊어버리는 것만 못하고 맞설 수 없다면 무엇 때문에 무기를 내버려두고 갑옷을 묶고 북쪽을 보고 신하라 하며 투항하지 않습니까? 지금 장군은 겉으로 복종이라는 이름에 의탁하고 있지만 속마음에는 미룬 계책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데 사태가 위급해져 결단을 내리지 않는다면 재앙은 매우 빨리 닥칠 것입니다.”

손권이 말했다.

만일 당신 말과 같다면 유예주는 어찌하여 조조에게 투항하지 않습니까?”

제갈량이 말했다.

전횡(田橫)은 제나라 장수일 뿐인데 절조를 지켜 굴욕적인 투쟁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유예주는 황실의 후예로서 걸출한 재능이 세상을 덮고 많은 선비가 우러러 흠모함이 마치 물이 바다로 흘러가는 것 같은데 만일 일이 성공하지 못하면 이것은 곧 하늘의 뜻일 뿐 어찌 조조의 신하가 될 수 있겠습니까!”

손권은 발끈 화를 내며 말했다.

나는 오나라 모든 토지와 10만 병사를 들어 다른 사람에게 통제를 받을 수 없습니다. 내 생각은 결정되었습니다. 유예주가 아니면 조조를 감당할 자가 없지만 유예주는 막 패한 뒤이니 어떻게 강대한 적에 맞설 수 있겠습니까?”

제갈량이 말했다.

유예주의 군대가 비록 장판에서는 졌지만 현재 군대로 돌아온 병사와 관우의 수군 정예 병사 1만 명이 있습니다. 유기가 강하의 병사들을 합친 것이 또한 1만 명보다 적지는 않을 것입니다. 조조의 군대는 먼 길을 왔기 때문에 지쳐 있습니다. 듣건대 유예주를 뒤쫓아 날랜 기병이 하루 낮 하룻밤 동안 3백여 리를 달려왔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른바 제 아무리 강한 활에서 떠난 화살이라도 그 마지막은 노나라의 명주조차 뚫을 수 없다.’와 같은 상태입니다. 따라서 병법에서는 이와 같이 하는 것을 꺼리며 반드시 상장군이 다치게 된다.’라고 했습니다. 게다가 북방 사람들은 수전(水戰)에 익숙하지 못하며 형주 백성이 조조에게 의탁하고 있는 것도 병력에 압박당한 결과일 뿐 마음으로 복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장군께서 진실로 용맹한 장수에게 명하여 병사 수만 명을 이끌도록 해 유예주와 힘을 합친다면 틀림없이 조조 군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조조 군이 지면 반드시 북쪽으로 돌아갈 테고 이와 같이 되면 형주와 오나라의 세력이 강대하져 셋이 정립하는 상황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성공과 실패의 관건이 오늘에 달렸습니다.”

손권은 매우 기뻐하며 곧장 주유, 정보, 노숙 등 수군 3만을 보내 제갈량을 따라 유비가 있는 곳으로 가서 힘을 합쳐 조조에게 맞서도록 했다.

결국 적벽대전에서 유비와 손권의 동맹이 승리하였고 조조는 크게 패해 북방에 돌아갔다. 이때부터 삼국정립의 형세가 이뤄지게 되었던 것이고 이런 형세를 만들어낸 일등 공신이 바로 제갈량이다.

그러므로 제갈량의 역할은 손권과의 동맹을 이끌어낸 것이지 적벽대전에서 도사의 모습을 하고 바람의 방향을 돌려 승리를 이끌어냈다는 것은 소설이지 사실이 아니다.

김정룡‘多가치포럼’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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