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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재해석(20)
유비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2)
[441호] 2021년 06월 16일 (수) 김정룡 기자 jzl0917@naver.com

2부 리그에 승격한 유비

유비가 서주를 맡은 것은 건안 원년(196)의 일이었다.

서주는 지리적으로 동서남북의 중심 요충지로서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도겸이 서주목일 때 서주의 중요성을 틀어쥐고 조조를 괴롭혔다.

유비가 서주의 두목이 되니 깜짝 놀란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가 바로 원술이다. 원술은 과거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머리에 털이 나서 유비란 사람이 있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소.”

다수 사람들이 유비가 미래에 영웅이 될 것이라고 높이 평가하는 마당에 원술은 유비를 하찮은 인물로 여겼었다. 그렇게 눈에 차지 않아 했던 유비가 서주목이 되니 원술의 마음이 편할 리가 만무했다. 원술은 유비를 제거하려고 공격에 나섰다.

이때 유비는 명성이 없이 3부 리그에서 맴돌던 그런 나약한 유비가 아니었다. 적어도 2부 리그에 명함을 내밀만한 자격을 가졌다. 그래서 원술이 한 달 넘게 쳐부수어도 굴복시키지 못했다. 원술과 유비가 이렇게 대치하고 있는 틈을 노린 자가 있다. 그가 바로 여포였다. 여포는 하비를 기습했다. 전투는 항상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간첩이 더 무서운 법이다. 여포를 남몰래 비밀리에 끌어들인 자는 바로 하비를 지키던 조표(曹豹)였다. 여포가 유비의 처자식을 포로로 잡고 있었으므로 유비는 군대를 돌려 해서(海西)로 갔다. 유비는 여포와 계속 맞서 싸우는 것은 손실이 크다고 생각하고 화해를 구하자 여포는 유비의 처자식을 돌려보냈다. 유비는 하비를 되찾고 관우를 지키게 했다.

유비가 소패로 돌아와 다시 병사 1만여 명을 얻었다. 이를 꺼려한 여포는 다시 유비를 공격했다. 유비는 여포에게 패배하여 서주를 버리고 조조에게 의탁했다. 조조의 덕분에 유비는 예주목이 되었고 여포를 사로잡았고 처자식도 돌려받게 되었다.

유비는 조조의 진영에서 최상의 예우를 받던 와중에 헌제의 장인 동승과 함께 조조 암살 사건에 휘말리게 되자 도망하여 원소에게 귀의한다.

유비는 실로 도망의 명수였다.

유비가 직접 원소를 찾아갈 면목이 없었던지 먼저 청주에 있는 원소의 장남 원담을 찾아갔다. 원담이 아버지 원소에게 소식을 알리니 원소는 부장을 보내 길에서 유비를 맞이하여 받들도록 하고 자신은 업성(鄴城)에서 2백 리 떨어진 곳까지 가서 유비를 만났다. 왜 원소는 이렇게 유비를 최선을 다해 맞이했을까? 원소의 입장에서 보면 조조와의 생사결단을 내는 대전투 관도대전이 눈앞으로 닥쳐왔기 때문에 유비 같은 인물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비는 관도대전에서 원소가 준 병력을 이끌고 살그머니 도망하여 형주목 유표에게 귀의한다.

 

 
   

 

적벽대전의 최대 수혜자 유비

유비는 제갈량을 보내 손권과 손을 잡았다. 손권은 주유, 정보(程普) 등 수군 수만 명을 보내 유비와 힘을 합쳐 적벽에서 조조와 싸워 크게 깨뜨리고 그 군선을 불태웠다. 유비와 오의 군대는 바다와 육지로 동시에 나아가 남군까지 추격했다. 그때 역병이 발생하여 북쪽 조조 군대에 사망자가 많으므로 조조는 병사들을 인솔하여 돌아갔다.”

이것이 진수의 <삼국지>에 기록된 적벽대전에 관한 전부의 상황이다. 천재적인 문학가 나관중은 이 기록을 근거로 <삼국연의>에서 8회 분량으로 늘려 기가 막히게 묘사했다. 이 부분이 독자들이 <삼국연의>를 읽는 가운데 가장 재미를 갖게 만들었을 것이다.

적벽대전의 묘미는 약자가 강자를 이겼다는 인간의 보편적인 로망의 심리를 충족시킨데 있다. 아무리 손권과 유비가 동맹을 맺었다 해도 양쪽 세력대비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론적으로 조조가 패했다. 약자가 강자를 이긴 전투였다. 한편 이 전투에서 나타난 여러 가지 기가 막힌 계책들, 이를테면 여러 유생들과 설전을 벌이다라든가, ‘제갈량이 주유를 격분시킨다라든가, ‘칼을 빌려 사람을 죽인다라든가, ‘풀배로 화살을 빌린다라든가, ‘감택이 거짓 항복 문서를 바치다라든가, ‘바람의 방향을 바꾼다라든가 하는 것들이 독자들을 흥미진진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런 스토리들은 재미위주의 허구일 뿐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다. 전부 허구라고 말하면 너무 인색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8~9할은 거짓이고 나머지 1~2할만 진실일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적벽대전의 8~9할은 문학적인 이미지가 각인된 결과이다. 역사사실이든 문학적인 이미지든 결과적으로 조조는 패했고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이 승리했고 이 전투에서의 최대 수혜자는 유비였다. 적벽대전 직전의 형세는 조조는 절반 중국을 차지했고, 손권은 강동 6주를 점령하고 있었던데 비해 유비는 겨우 한 개 군()에 유기의 지분까지 합쳐 2만의 병력밖에 없었다. 유비는 승리의 여세를 몰아 표를 올려 유기를 형주 자사로 임명하는 한편 남쪽으로 4개 군을 정벌하러 갔다. 무릉 태수(武陵太守) 김선(金旋), 장사 태수(長沙太守) 한현(韓玄), 계양 태수(桂陽太守) 조범(趙範), 영릉 태수(零陵太守) 유도(劉度)는 모두 투항했다. 유기가 죽자 유비는 형주목이 되었고 공안현을 다스렸다.

 

 

 

드디어 1부 리그에 명함을 내민 유비

 

 

 

건안 19(214) 익주목 유장이 유비에게 항복했고 유비는 드디어 촉을 차지하게 되었다. 촉은 풍요롭고 생산물이 풍부한 곳이므로 유비는 주연을 열어 병사들을 위로하고 성안에 있던 금과 은을 취해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곡물과 비단을 있던 곳으로 돌려보냈다.

유비는 익주목을 겸하고 제갈량은 그를 보좌하며 법정은 꾀를 내는 상담역을 하고 관우장비마초는 무장이 되고, 허정미축간옹(簡雍)은 귀빈 대우를 받았다. 나머지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니 뜻 있는 선비 치고 진력함을 다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유비는 이제야 드디어 근거지다운 근거지를 갖게 되었고 손권과 조조에게 동급으로 게임을 하기를 바랐다. 건안 24(219) 봄 유비는 어깨에 힘이 실려 이젠 조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조조가 비록 지금 온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반드시 한천(漢川)을 지킬 것이다.”

유비는 과연 조조의 공격을 물리치고 그해 가을 한중왕이 되었다. 건안 26(221) 46일 황제로 등극했다.

 

 
   

 

조조는 왜 유비를 죽이지 않았을까?

 

 

 

건안 원년(196) 조조가 천자를 허도에 모셔오자 수많은 사람들이 조조에게 귀의했다. 이때까지 정체불명으로 베일에 가려져 있던 유비가 조조에게 왔다. 유비는 관도대전 전에 불과 몇 년 동안에 여러 차례 주인을 바꾼다. 처음에는 공손찬에게 의탁하여 원소를 공격했고, 도겸에게 붙어 조조를 공격했으며, 조조에게 의탁하여 여포를 공격했고, 이번에는 원소에게 의탁하여 다시 조조를 공격하고 있다. 한 때 여포와 손을 잡은 적도 있다. 그 후 유표와 유장까지 합치면 유비는 일생동안 주인을 일곱 번 바꿨다.

건안 5(200) 조조가 원소와의 대전을 벌이기 전에 먼저 유비를 공격한다. 당시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다.

명공과 천하를 다투고 있는 사람은 원소가 아닙니까? 어째서 유비를 치료고 합니까?”

조조가 말했다.

유비가 진정한 인걸이오. 지금 그를 없애지 않으면 끝없는 후환이 생길 것이오.”

조조는 유비를 평범한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조조는 유비를 심지어 영웅이라고 했다.

<삼국지> 선주전에 이런 기록이 있다.

선주가 출병하기 전에 헌제의 장인인 거기장군 동승은 의대(衣帶) 속에 넣은 헌재의 밀서를 받았음을 말하며 조공(조조)를 죽여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선주는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이때 조공이 조용히 선주에게 말하기를 지금 천하의 영웅은 오지 그대와 이 조조뿐이오.’라고 했다. 선주가 마침 음식을 먹고 있다가 수저를 떨어뜨렸다. 그 후 마침내 동승 및 장수교위(長水校尉) 종집, 장군 오자란(吳子蘭), 왕자복(王子服) 등과 함께 거사를 도모하였다. 그러나 마침 파견되는 바람에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일이 발각되어 동승 등은 모두 복주(伏誅) 되었다.”

유비가 무슨 파견을 받았나? 조조가 유비를 서주에 가서 원술을 공격하라고 보냈던 것이다.

이 사건을 역사에서는 의조대사건이라고 부른다. 이 엄중한 사건에서 유비는 어떻게 살아났을까? 동소는 조조가 유비에게 병력을 주어 원술을 공격하게끔 하는 것에 반대하고 나섰다.

유비는 용맹하고 야망이 크며 관우와 장비가 그를 돕고 있어 그의 속마음을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

조조는 그다지 개의치 않는 투로 말했다.

내가 이미 허락한 일이오.”

모사인 정욱과 곽가가 함께 조조를 찾아 말했다.

공께서 전일에 유비를 제거하지 않았을 때 저희들은 참으로 공의 생각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지금 그에게 병사를 빌려준다면 그는 반드시 다른 마음을 품을 것입니다.”

조조는 이렇게 반응했다.

후회하여 유비를 추격하였으나 따라 잡지 못했소.”

결과적으로 조조는 잘못 판단하여 유비를 놓치고 말았고 이는 이후 조조에게 유비는 앓는 이처럼 굉장히 불편한 존재였다.

조조는 그전에도 몇 차례 유비를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결코 그를 죽이지 않았다. 유비가 조조에게 의탁했을 당시 조조의 모사인 정욱은 조조에게 말했다.

유비를 보면 웅재가 있어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결코 남의 밑에 있을 사람이 아니니 일찌감치 도모하는 편이 났습니다.”

조조의 생각은 달랐다.

바야흐로 지금은 영웅을 모을 때이지 한 사람을 죽여서 천하의 마음을 잃을 때가 아니니 죽이는 것은 불가하오.”

조조는 유비를 죽이기는커녕 그에게 예주목을 내리고 좌장군에 봉하며 나갈 때에는 수레를 함께 타고 앉을 때는 동석할정도로 예우했다. 물론 조조가 유비에게만 이런 예우를 한 것이 아니라 오늘은 순욱에게, 내일은 가후에게도 이렇게 했을 것이다. ? 난세이니깐 신하들과 친한 척 하는 제스처가 필요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처자식은 버리면서 백성을 챙기는 유비

 

 

 

유비가 번성에 주둔하고 있을 때 조조가 쳐들어오는 줄 몰랐다. 조조의 군대가 완성에 이르러서야 그 소식을 듣고 병력을 이끌고 부랴부랴 번성을 떠났다. 당양에 이를 무렵 유종의 측근과 형주 사람들이 유빙에게 귀의하여 병력이 무려 10만여 명이나 되고 군수물자는 수천 대나 되어 하루에 10리 밖에 가지 못하므로 어떤 이가 말했다.

마땅히 빨리 가서 강릉을 보존해야 합니다. 지금은 비록 사람이 매우 많지만 무장한 이는 적습니다. 만일 조조의 군대가 다다르면 그들을 어떻게 막겠습니까?”

유비가 말했다.

무릇 큰일을 이루려면 반드시 인심을 근본으로 해야 하오. 지금 백성이 나에게 돌아왔는데 어찌 그들을 버리고 가겠소.”

이중텐 교수는 유비의 이 행위를 이렇게 평가했다.

아마 유비의 일생에서 가장 빛난 순간이었을 것이다.”

조조가 정예 기병 5천 명을 이끌고 급히 뒤쫓아 하루 밤낮에 3백여 리를 가서 장판(長坂)까지 추격했다. 유비가 처자식을 버리고 제갈량, 장비, 조운 등의 수십 기마와 달아나자 조조는 백성과 군수물자를 크게 거두었다.

이 대목은 진수의 <삼국지> 선주전에 기록된 것이다. 그런데 <삼국연의>는 조운이 조조의 군의 겹겹의 포위를 뚫고 어린 유선과 감부인을 말에 태우고 탈출했고 유비의 진영에 이르자 유비가 어린 유선을 던지며 하마터면 유능한 장수를 잃을 뻔 했다.’고 말하자 조운은 엎드려 충성을 맹세했다. 소설의 이 스토리에는 두 가지 허구가 있다. 하나는 사서에서는 조운이 유비 따라 달아났다고 했는데 그가 유선과 감부인을 구해 탈출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유비가 어린 유선을 땅바닥에 내던지며 말했다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전투에서 진실은 유비가 처자식을 버리고 도망한 것이다.

이와 비슷한 사건이 조조에게도 있었다. 장수가 갑자기 반란을 일으켜 조조는 아들 조앙과 조카 조안민 및 장수 전위를 잃었다. 싸움이 끝난 후 조조는 제단을 설치하여 전위게게 제사를 지내며 통곡하고 눈물을 흘린다. <삼국연의>는 이렇게 곡했다고 한다.

내가 장자와 사랑하는 조카를 잃은 것은 깊이 가슴 아파할 일이 없으나 유독 전위에 대해서는 통곡하게 되는구나.”

조조의 이 통곡에 주변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감동했다. 이것은 완전히 뻥이다. 조조도 칠정을 지닌 인간인데 아들과 조카보다 장수의 죽음을 더 비통해 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조조가 죽기 전에 남긴 말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나는 일생 동안 한 모든 일 중에 후회할만한 일이 있다고도, 누구에게 미안한 일을 했다고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오직 한 가지, 저승에 간 다음에 자수(조앙)가 제 어미를 찾으면 내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조조는 죽을 때까지 장남의 죽음을 잊지 않을 만큼 상처가 컸는데 부하 장수보다 아들의 죽음을 더 가볍게 여겼다는 것은 인지상정에 위배되는 말이다.

소설은 인지상정을 떠나 유비가 처자식을 버리고 달아난 행위에 대해서 전혀 문제 삼지 않고 백성을 떠나지 못하겠다는 태도에는 굉장히 높은 점수를 부여했다. 아마 이것이 진정한 영웅의 기개라고 찬양하고 싶었던 모양이고 이렇게 해야만 독자들의 주목을 끌 수 있다고 여겼던 모양이다. 실제로 유비는 처자식을 네 번이나 버리고 도망갔는데 이런 매정하게 천륜을 저버린 사람을 최고 영웅이며 최고 위대한 인물로 대접한 것은 너무나도 비현실적이고 비상식적인 미스테리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유비의 영웅기질

 

 

 

삼국시대 호걸들을 효웅, 영웅, 간웅 등 세 가지로 나눈다. 하지만 누구누구는 효웅이요, 누구누구는 영웅이고, 누구누구는 간웅이라고 콕 짚어 말할 수는 없다. 좀 확실했던 것은 조조를 1800여 년 동안이나 간웅취급해오다가 최근 들어 영웅으로 재해석하여 억울한 누명을 벗고 있는 중이다.

<삼국연의>에서는 유비를 영웅 중에서도 으뜸의 영웅으로 각색하였지만 사서에서는 그렇지 않다. <삼국지> 선주전의 제목을 저자는 때를 기다린 천하의 효웅(梟雄)이라고 달았다. ’효웅이라는 어휘는 용맹하다, 재주가 뛰어나고 기백이 있다. 잘 길들여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서에서 유비를 효웅이라고 했기 때문에 유비가 진짜 영웅의 자격이 있냐는 시시비비가 끊이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유비와 동시대에 호흡하며 살았던 호걸들은 유비를 어떻게 보았을까?

원소는 유비를 고아하며 신의가 있다고 말했다. 유비가 찾아온다는 소식을 듣자 원소는 200리 밖에 가서 마중했다.

조조의 모사 정욱은 이렇게 말했다.

유비를 보면 웅재(雄才)가 있어 대중의 마음을 잘 사로잡으며 결코 남의 밑에 있을 사람이 아니니 일찌감치 도모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나 조조는 유비를 죽이지 않았고 천하의 영웅은 그대와 이 조조뿐이오.’라고 말했다.

도견과 진등은 서주를 안정시킬 영웅은 오로지 유비라면서 맡아줄 것을 간곡하게 청원했다.

원술만이 내가 머리에 털이 나서 유비가 있다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소.’리고 말했다. 원술 제외하고는 유비와 동시대에 호흡했던 호걸들은 절대다수가 유비를 영웅의 기질을 갖춘 인물이라고 보았다.

유비가 제갈량을 만나기 전에는 전공도 별로 없었고, 근거지도 확보하지 못해 자체 세력이 없어 여기저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의탁하여 얹혀사는 더부살이 신세였다. 그러나 유비는 처가살이하는 시원치 않은 사위였으면서도 불구하고 자존심 하나는 끝내주는 사나이였다. 일곱 사람한테 귀의했지만 한 곳에 오래 머물지도 않고 쩍하면 몰래 도망가기 일쑤였다. 왜 그랬을까? 유비는 영웅의 기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유비가 영웅의 기개와 영웅의 기질이 없었다면 진즉에 포기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유비는 온갖 무시와 경멸 속에서도 꿋꿋이 뻗힌 덕분에 끝내 성공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유비의 성공은 제갈량 덕분

 

 

 

뜻이 있는 사람에게는 기회가 오는 법이다. 유비에게 최대의 좋은 기회는 제갈량을 만난 것이다. 유비가 만약 제갈량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냥 3부 리그나 기껏해야 2부 리그에서 맴돌다가 인생을 마쳤을 수 있었다. 다행이 제갈량이라는 걸출한 선비를 만나 전국구로 인정받기 시작했고 나중에 황제로 등극할 수 있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아무튼 건안 12(207)에 유비는 제갈량을 초빙하여 승승장구의 길로 접어들었던데 비해 그해 곽가를 잃은 조조는 이듬해 벌어진 적벽대전에 패배하였고 더는 남쪽으로 세력을 넓히지 못하고 북방에서 맴돌았다. 물론 여러 차례 남쪽 정벌과 오나라를 습격하기도 했지만 끝내 굴복시키지 못했다.

제갈량이 유비의 진영에 발을 디뎌서 처음 성과를 낸 일은 손권과의 동맹을 이뤄낸 것이었다.

유비와 손권이 손잡고 힘을 합쳤기 때문에 강대한 조조의 군을 패배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제갈량의 천하삼분계책 덕분에 서남에서 촉을 차지하여 항제에 등극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제갈량은 정말 신과 같은 존재였을까?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알고 있는 제갈량은 역사적인 이미지에 맞는 것일까?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제갈량의 이미지 7~8할은 문학적인 이미지일 뿐이다.

그렇다면 제갈량의 역사적인 이미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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