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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일견(一见 )
[427호] 2020년 11월 16일 (월) 동포타운신문 dongpotown@daum.net

이제 만나러 갑니다.” 프로그램에서 북한 평양 장마당의 한 모퉁이-귤 껍질을 벗겨서 한 조각씩 팔 수 있게 놓은 사진을 보고 찡-해오면서 조선에서의 며칠간의 추억을 소환하게 된다. 이제는 가물가물해진 기억의 한 조각들이다.

20063월에 나는 인맥으로 추천 받아 김일성 종합대학에 학위 획득을 위한 학습기회를 얻어 가게 되었다. 대학 선생님들이 추천 받아 가는 타임에 운 좋게 특별한 케이스가 된 것이다. 김대(金大) 측의 요구는 한 학기 최소 몇 달간의 학습인데 당시 하얼빈 조선중학교교사로 있는 나로서는 장기 휴가가 불허했다. 단지 10일간 휴가를 맡고 김대의 지도교수님과 첫 대면도 하고 아울러 논문 과제에 대한 검토와 조언도 받고 등록을 해야 하고 해서 겸사겸사 가게 되었다.

우리 일행은 모두 다섯이었다. 나를 제외하고는 다 대학교 선생님들이었다. 심양에 도착한 다음날 오후에 북한 고려 항공사 비행기에 오르게 되었다. 한 시간 넘어 평양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동석한 사람들 대부분이 중국 사람들이었고 많이는 무역으로 간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비행장에서 물건 찾고 출구 쪽 카운터에 가서 등기하고 사진기, 폰 등을 규정대로 휴대하지 못하게 하여 공항에 무조건 맡겨두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우리는 무릇 사상은거세한 채 북한 측의 요구대로 하면서 이 땅의 자존심과 상처를 어렴풋이 느낄 수가 있었다.

노트북만은 허용해서 트렁크에 넣고 마중 나온 학교 측 책임자인 리 선생님과 인사 나눈 후 김대로 향하는 전용버스에 올랐다. 평양의 날씨는 중국 동북의 날씨와 비슷하여 길가의 가로수들은 잎이 다 떨어져 벌거벗은 채로 서 있었고 따라서 날씨도 추웠다.

지난 70년대 조선예술영화가 중국을 휩쓸던 때가 있었다. “사과 딸 때” “남강 촌의 부녀들” “꽃피는 마을” “은희와 금희의 운명” “꽃 파는 처녀등을 즐겨 본 나는 조선에 대한 인상이 좋았다. 그래서 평양에 대한 호기심으로 줄곧 창밖을 응시하면서 언젠가는 눈에 번쩍 띄는 모습으로 바뀌지 않을까 기대하였다. 색다른 발견 없이 우리는 여명 거리에 있는 목적지에 도착했고 각각 단독 기숙사를 배치 받았다. 2층에 있는 나의 기숙사에 들어서니 첫 눈에 안겨오는 것은 벽 중간에 나란히 걸려있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초상화 액자였다. 그리고 일인용 침대, 책장, 테이블, 옷장도 있는 비교적 쾌적한 공간이었다. 난방 시설은 바닥에 깐 전기 설비다. 화장실은 복도에 나와서 세면실과 이어진 공용화장실을 이용해야 했다. 저녁은 학교의 연구생을 위한 식당에서 부족함 없이 잘 접대 받았다.

다음 날 오전 우리는 김대로 갔다 기숙사에서 나와서 좀 올라가 대통로를 가로질러 가면 학교 정문이 보이는데 김일성 종합대학이라고 멋있게 기운 듯 쓴 필체가 눈에 들어온다. 정문으로 들어가면 학교 캠퍼스가 펼쳐지는데 수림이 보이고 우측으로 학교 건물이 서 있고 서서히 올리 뻗은 길을 따라 걷다 나니 또 주체 건물들도 보이었다. 우리는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각기 지도교사님들을 만나 독실에서 담화를 나누었다. 나의 담당 지도교수님은 50여세로 보이는 멋진 분이었다. 문학에 대한 선천적인 예민성과 호감을 가진 분이었다. 우리는 연구 과제를 갖고 이야기 나누고 이어 나는 논문에 대한 요구와 자수 등을 문의했고 우수한 논문을 좀 보았으면 하는 의사를 말해서 논문집을 받아 들고 갈라졌다. 다음 행사를 위해 우리들은 평양 지하철을 타러 갔다.

지하철 출입구 복도로는 각종 벽화가 있고 천정은 샹들리에 등으로 장식되어 아름다웠다. 에스컬레이터가 너무 경사져서 내려갈 때는 아찔했고 지면으로 오를 때는 앞 사람들의 발꿈치가 보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상 싶다. 서울에서도 긴 에스컬레이터를 만날 때도 있지만 평양지하철이 경사 각도도 더 심하고 길이도 더 길다. 지하철 안은 러시아워인지 사람들로 콩나물 시루안을 연상시키었고 몸에서 나는 냄새가 계속 코를 자극했다. 우리는 지하철을 나와서 고려 호텔도 가보고 그리고 주 북한 중국 대사관으로 향했다.

중국대사관에 가는 것은 필수 통과의례로 되어있다. 한 나라의 대사를 직접 만난다는 것이 나는 처음이었다. 우리를 맞이한 대사님 부부는 소박한 중국 분들이었다. 조선어를 잘 구사했고 일찍 한국 대사로 서울에도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대사님은 우리에게 체류기간 주의해야 할 사항에 대하여 언급했다. 한국은 남조선이라고 해야 하고 당국의 정치 등에 대한 질문은 삼가하고 일반적인 말만 하면 된다는 등 내용들이었다. 대사님은 갈라지면서 우리에게 중국 전통적인 새해맞이 공예품을 하나씩 주었는데 전에 못 본 재질로 정교하게 되어있어 집에 돌아온 후 오랫동안 책장 고리에 걸어 두었었다.

오후에 우리는 국비 박사과정중인 손 선생님을 통하여 좀 높은 환율로 환전을 해서 북한 화페를 소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북새 거리에 있는 상점들도 가 보았다. 여러가지 신식 전자제품들-컴퓨터, 노트북, 최신형 TV, 냉장고, 세탁기, 밥솥 등 크고 작은 것들이 많이 진열되어 있었고 고객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수입 수출품 가게에도 가보았는데 눈에 띄는 좋은 것들도 있었다. 나는 딸을 위한 선물로 예쁜 면 치마를 샀고 심 선생은 고급 머플러를 샀는데 촉감이 부드럽고 소재가 좋은데도 위안화로 30원 상당의 가격이어서 놀라왔다. 가고 오는 길에 거리의 식당들도 눈에 들어왔는데 식사 시간대가 아니어서인지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브의 단편 소설의 한 구절- 굶은 입을 벌린 것 같다-가 떠오르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우리는 가까운 장마당에 갔었다. 여러 종류의 먹거리, 과일 지어 화장품, 의류, 신 등들도 있었다. 물량이 적고 오합지졸인 것은 밀수품인 것 같아 보였다. 우리는 거기서 양주, 맥주 그리고 통조림 등을 사고 등산용 신을 샀다. 저녁 식사 후 우리는 유일한 남선생이 있는 좀 큰 기숙사에서 6인조의 파티를 열었다. 나를 제외한 기타 분들은 같은 대학 여러 계에서 온 선생님들이라 평소 알고 있었고 나는 추천자의 부탁과 안면 때문에도 편하게 합류되었다. 유머스러운 양 선생님, 매력적인 젠틀 가이 유일한 남성 김 선생님, 지적이고 정색해서 은근히 웃기는 F선생님, 아름다운 미모의 심 선생님, 생기발랄한 30대인 손 선생님, 연령층이 다른 우리들은 오가는 말들이 별 제한 없이 자유로 왔고 지적이고 인간적이었다. 개인기 발휘하여 노래도 곁들이니 간단한 캠핑 음식에 파티 기분이었다. 모임에는 분위기 메이커 잘 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셋이나 되니...대학선생님들의 자질이 드러나는 모임이었다.

다음날부터는 학습이다. 저녁에는 모란봉 방향으로 산책 떠났다. 군인들이 보이는 군사구를 지나 한참 걷다 나면 좀 언덕진 산등성이 같은 산책로가 있다. 깨끗이 다듬어진 길이라 오르다 나면 책도 읽고 쉬라는 듯 가끔 벤치도 만난다. 돌아오는 길에 은근 슬쩍한 양 선생님의 입담으로 모두 즐거웠다. 멀리 가까이 보이는 고층건물들은 불이 켜진 집들도 있지만 불이 꺼진 집들도 많아 도시가 아늑한 느낌이었다. 중국의 지난 70년대에 아버지가 공장에서 퇴근하고 집에 오면 저녁 식사하고 이야기 좀 나누고는 낮은 볼륨으로 한국방송 듣고 우리는 숙제 하고 불 끄고 잠자리에 들군 했던 나날들이 떠오른다. 이 나라도 전력 자원이 부족한 모양이다. 저녁에 조선 석사 연구생이 중문에 관하여 물을 것이 있다고 해서 소개받아 내 숙소에 왔다. 나는 중문으로 짧은 글 쓴 것을 보아주고 중문으로 대화도 좀 나누었다. 그 학생에게 일상생활에서 담화내용에 대한 제한이 있는 가고 물어보니 없다고 웃으며 말해 그 깊이를 알 수는 없다. 점심 식사 후는 식당 울안에 있는 농구대에 농구공 넣기 시합도 같이 하고 저녁에는 모란봉 산책을 계속하고 파티도 두세 번 열고 나름 즐거이 충실히 보냈다.

대통로로 질주하는 여러 가지 차량들도 적지 않았고 때로는 차량에 설치한 확성기로 주체사상선전인 듯 알 듯 모를 듯한 높은 억양의 말들이 울러 퍼지어 포연의 냄새가 나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안전하고 평화로운 나날들이었다. 자가용도 심심찮게 보게 된다.

우리는 짬을 내서 김일성 광장, 3대혁명 전시관도 가보았고 더 많은 곳을 가보고 싶었지만 다음으로 미루었다. 이틀에 한 번씩 샤워하러 기숙사와 좀 떨어진 공용목욕탕에 갔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공중 욕탕인데 걸상에 앉아서 씻고 합탕도 있고 사우나 칸도 있어 좋았다.

구매력과 물품의 빈약을 느끼게 되는 때도 있다. 기숙사 주위의 작은 가게에 들리면 보이는 줄을 세워 놓은 간장, 초병 이라든가 신문가게에서 담배를 한 곽이 아니고 한대 혹은 몇 대씩 사기도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드는 느낌이다.

우리는 자연이 당지 사람들도 만나게 된다. 말을 걸어오는 해외파인 듯한 젊은이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평범히 거리를 두었다. 가까이 다가서면 순박하고 동질감도 있었다. 전기 시설 고장이 나서 기숙사에 와서 수리해준 분, 식당의 식모들도 친절하였다. 한번은 장마당 부근에서 한 특수 훈련을 받은 듯한 건장한 남자와 몸 1/3가 부딪치다 싶이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느꼈던 충격은 마치 바위와 부딪친 것처럼. 사람과 부딪쳐도 교통사고 같은 느낌이구나 하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런데도 미안하다 말 한마디 없이 미동으로 쓱 지나치는 것이었다. 고의적인 것은 아닐 거고 어쨌든 사람 사는 곳은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는 법이다. 한번은 산책길로 올라가다 나니 두 젊은이가 대화하면서 저쯤에서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 밝은 햇살 같은 웃음과 건강한 팔팔한 분위기가 조선은 이런 사람들이 있어 희망이 있고 살아 움직일 것이라는 느낌을 진하게 갖게 한다.

우리가 있는 기간 길림 대학의 한 50대의 선생님이 박사학위 논문 답변을 받기 위해 왔다. 세상에 쉬운 일은 없듯이 심사 과정이 관문도 있고 나름 엄격한 듯하다

약속된 10일이 되고 나는 떠나야 했었다. 김대의 책임자인 리 선생님의 배웅 하에 우리는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떠났다. 수속을 끝내고 갈라지면서 그분이 손을 내미는데 손을 잡은 나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그간의 따뜻한 접대비용 한 푼 내지 않고 좋은 음식 먹고 귀빈처럼 여러 모로 신경 쓰 준 것에 감사했다. 아직도 빈곤한 이 땅에 대한 애틋한 연민의 정, 같은 조상들의 후손이라는 것 때문에도 가슴이 아파 났기 때문이다.

그 후 나는 매 학기 개학한 후에 정기적으로 가야 하는 김대의 시간 요구에 일정을 맞출 수 없는 개인 사정 때문에도 애석하지만 평양행을 더 진척시키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요절 시키고 말았다. 그래서 북조선 평양 일견은 첫 회로 끝났고 소중한 추억으로만 봉인되고 말았다. 지금은 가끔 이만갑채널에서 많이 달라진 평양의 화면을 접하게 되면 반갑고 나라가 여러모로 더 발전하여 인민들의 소중한 삶의 터전이 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들 따름이다. 3,8선으로 긴 시간 갈라진 남북이 자유로이 오가고 경제문화교류도 진행하면서 서로의 땅을 밟아보고 여행이라도 하면서 사진도 맘껏 찍고 그런 날이 오면 너무 좋을 것 같다.

 
리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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