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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의 성격 (8)
[375호] 2018년 09월 16일 (일) 김정룡 기자 kzl0917@naver.com

8. 신경이 굳어있는 민족(痲木不仁)

 

‘신경질’, 이 낱말의 같지 않은 여러 가지 용법은 하나의 지극히 특수한 면에서 현대문명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 낱말의 본래 뜻은 ‘신경적이며 강인하며 건장하며 강건하고 힘을 갖고 있다.’이다. 그런데 이 낱말의 파생의미로서 오늘날 우리가 가장 일상적으로 쓰는 ‘신경쇠약 혹은 신경과민, 쉽게 흥분하고 때로는 나약함’ 등등이다. 이와 같이 내용이 복잡한 어휘는 각종 신경질병을 잘 표현되고 있고 오늘 날 우리에게 이미 귀에 익은 일상용어로 자리매김 되었다. 의심할 나위 없이 현대문명은 사람으로 하여금 신경이 흥분되게 하고 상대적으로 신경질병도 앞선 세기보다 더욱 보편화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말하려는 것은 신경병환자가 아니라 서양의 민중계층을 가리키는 것이며 그들 중 당연히 모든 독자들도 포함되어 있다. 증기기와 전기화 시대에 살고 있는 앵글로`색슨인의 신경긴장 상태는 정기적인 우편배달 선박운행과 마차로 우편을 배달하는 고로하고 느린 시대 인간에 비해 당연하게 다르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시대는 활력이 넘치지만 분망한 시대이다. 사람들은 늘 분주하며 심지어 간식을 먹을 짬도 없이 신경이 줄곧 긴장상태에 있으며 그 결과는 뻔하다.

우리시대의 상인은 초조한 심정으로 늘 한 통의 소식(電報)을 기다리는데 마치 그 소식의 내용이 완전히 그들의 운명이라도 바꿔놓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들의 맘속의 이런 상태는 무의식적으로 각종 행위에서 드러나고 있다. 우리는 느긋하고 여유롭게 조금이라도 앉아 있지를 못하고 거꾸로 늘 초조하고 불안해한다. 우리는 대화할 때 연필을 갖춰 갖고 무언가 적는데 마치 이 시각을 놓치면 영원히 늦어질듯이 분주하다. 우리는 팔을 걷고 마치 혼신의 힘을 다 쏟는 준엄한 사명을 완수할 것처럼 만반의 준비를 한다. 우리의 손은 늘 쉴 틈 없이 바쁘고 끊임없이 동쪽을 기웃거리다가 서쪽을 주시하는 것이 마치 어두운 곳에 위험한 야생동물이 숨어 있지 않냐고 근심하듯 말이다. 우리는 시도 때도 없이 무언가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려 몇 가지 요긴한 일을 처리한다. 우리의 신경이 과부하에 시달리는데 그 결과는 ‘가짜 장부를 보고하는 경련’, ‘소식 경련’, ‘메모 경련’ 등등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 그보다 훨씬 더 넓은 범위에서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이미 과거처럼 편안하게 잠들 수가 없이 현재의 상황은 자는 시간이 짧고 휴식도 충분치 못하다. 우리는 늘 미세한 소란에도 깨곤 하는데 나무 위의 새가 지저귀거나 어두운 침실에 가는 빛이 든다든가 바람에 알리미늄 창문이 삐걱대는 소리 및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에 깨기만 하면 잠이 말끔히 도망간다. 우리는 매일 삶의 번뇌를 지고 휴식하기 때문에 그 결과는 진정한 휴식을 취할 수가 없이 매일 긴장상태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와 같은 시대를 반영하는 격언이 있다. 은행을 잘 꾸리려면 행장이 밤낮 없이 헤매는 수밖에 없다. 어렵지 않게 이해가 간다. 주주들은 앉아서 이윤을 챙길 수 있지만 재수 없는 것은 늘 행장이다.

우리는 이미 서양생활 속에서 우리가 익숙한 각종 사실을 자세하게 언급했다. 서양인이 중국인을 익숙하기 시작할 때 이러한 사실ㅇ 자신이 중국에서 보고들은 것들과 강열하게 대비된다. 중국에서는 시체를 해부하는 것을 보기가 매우 드물다. 의심이 갈만한 해부가 아닐지라도 우리는 종래로 사람으로 하여금 간장하게 하는 해부를 설명하는 사람을 들어 보지 못했다. ‘검은 머리’와 백인이 어떤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중국인의 신경이 서양인에 비해 기하학의 술어로 말하자면 ‘갖거나 비슷하거나’일 것이지만 그들의 신경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중국인은 인내심이 매우 강하다. 특정 위치에서 긴긴 시간을 머물러도 무엇이 다른지 보아내지 못한다. 글을 쓴다하면 그는 마치 기계처럼 하루 종일 쓴다. 만약 그가 수공업자로서 바느질하거나 악세사리를 만들거나 혹은 다른 어떠한 일을 하든지 그는 한 곳에서 날이 밝을 무렵부터 해가 져 어두울 때까지 머물고 있다. 아무리 매일 반복되고 변화가 전혀 없이 단조로워도 한 점의 메마르고 지루함을 느끼지 못한다. 중국의 소학생도 각종 제한을 받아 온 하루 학교에 갇혀 있다. 수업도 단조롭고 또 그것이 반복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서양의 소학생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미쳐버릴 것이다. 중국의 아이들은 늘 전혀 움직임이 없이 서 있거나 앉아 있거나 엉거주춤하거나 해도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여전히 태연하게 잘도 참는다. 표정이 한 점의 흔들림도 없을 정도다. 서양의 아이들은 익살스럽게 웃기는 동작을 하며 마치 원숭이처럼 살아가고 있다.

중국인은 생리상의 인지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스포츠 단련은 부질없는 일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들은 외국인이 명확한 방향이 없이 마음대로 어디론가 향하는 갈망을 이해하지 못한다. 구경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긴 거리 야외 시합에 참가하는 충동을 일으키게 만드는지. 그들이 볼 바엔 질서 없이 뛰놀면서 서로 붙자는 술래놀이 유희가 구경 어떤 동기에서 생겨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비교적 사회신분이 높은 서양인이 온 오후 햇볕아래에서 야구를 사람이 닿지 못하는 곳을 향해 치거나 혹은 몇 사람이 한 공을 빼앗아 상대의 진지에서 그를 ‘죽이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한 광동의 교사가 한 외국인부녀가 테니스를 치는 것을 보고 하인에게 물었다. “저 여자가 이렇게 앞뒤로 정신없이 달아 다니는데 얼마의 보수를 받느냐?” “보수가 없다”고 말하자 그는 믿지를 않는다. 쿠리(苦力)를 고용해서 해도 될 일을 왜 하필이면 수고스럽게 본인이 하는가? 아무리 재차 설명해도 이 점에 대해선 중국인은 이해할 길이 없다.

수면에 있어서 중국인과 서양인은 역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중국인은 어떤 곳이든 모두 잠들 수 있다. 우리들을 미치게 하는 작은 소란도 그들의 수면을 방해하지 못한다. 벽돌을 베개 삼아 잠자고, 짚 혹은 흑 벽돌 및 넝쿨로 만든 침대에서도 여전히 잘 자고 다른 걱정은 전혀 하지 않는다. 그들은 방안을 어둡게 할 필요도 없고 다른 사람이 조용히 할 필요도 없다. 영아가 밤중에 우는 것은 영아의 울음일 뿐 그들을 깨우지 못한다. 어떤 지방에서는 하나의 보편적인 본능으로서 모든 사람이 점심 후 두 시간씩이나 잠을 자는 것이 점차 습관이 되어 그들이 어느 곳에 있든 모두 그 시간 때에 정확히 잠든다. 오후 이 두 시간은 온 세계가 조용해 마치 그 잠자는 두 시간과 같다. 일하는 사람은 어디서 잠들던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지만 기타 사람들도 모두 똑 같다. 세 바퀴 리어카에 자빠져 머리를 숙이고 마치 한 마리 거미가 벌린 입 안에 파리 한 마리 있는 상황에서도 잠든다. 만약 이 면에서의 능력을 발휘하는 시험을 조직한다면 중국에서 매우 쉽게 하나의 백 만 대군, 아니 천만의 대군도 모집이 가능할 것이다.

이외 우리는 반드시 이런 사실에 중의할 필요가 있다. 중국에서는 신선한 공기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무방하다. 어느 곳이든 진정한 통풍시설이 없다. 태풍이 지붕을 날라버리든가 혹은 주인이 굶주려 가옥을 헐어 목재로 팔아먹든가 외에는 그렇다는 것이다. 우리는 주거상태가 몹시 비좁다는 얘기를 들었으나 중국에서는 보편적인 일로서 어떤 불편함도 못 느끼고 혹자는 거론할 가치도 없다고 여긴다. 만약 그들도 우리 앵글로`색슨인처럼 신경과민이라면 그들은 상상 못할 고통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중국인의 인내는 또 그들이 아픔을 참는 데서도 표현된다. 중국병원에서의 수술상황에 대해 조금이라도 들은풍월이 있는 사람은 모두 알고 있듯이 중국의 환자들이 아픔을 참아내는 것은 얼마나 흔한 일인지. 그들이 참아내는 아픔은 우리 아무리 가장 건장한 사람도 금세 물러설 것이다. 이 논제만 갖고도 하나의 훌륭한 논문이 매우 쉽게 작성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잠시 놔두고 먼저 조지`애르트의 한 통의 편지 속 한 구절에 귀를 기울여보자.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은 마취제를 사용하지 않고 눈을 편히 뜨고 아픔을 참아낸다. 만약 그녀의 말이 옳다면 의심할 나위 없이 대다수 중국인은 신의 부름을 받았거나 신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일 것이다.

브랑닝 부인(1806~1861, 영국 시인)은 “타인의 차가운 시선을 받는 것은 완전히 하나의 시달림이다.”고 말했다. 이런 사람은 곧 그녀처럼 민감한 여 시인이거나 혹은 그녀와 비슷한 사람들일 것이다.

서양인은 타인의 감독을 받는 것을 싫어한다. 특히 그가 한참 정밀하고 힘든 일을 할 때 더욱 그렇다. 그러나 중국인은 다른 사람의 감독이 있어야만 일을 훌륭하게 해낸다. 외국인이 드물게 가는 곳이라면 우리는 늘 중국인들에게 둘러싸여 있기 일쑤이다. 우리는 항상 호소한다. 그들을 쫓아버리지 않으면 우리는 곧 미쳐버릴 것이라고. 하지만 이 사람들은 오직 동정심이 없이 우리를 관찰할 뿐 그 어떤 피해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중국인을 놓고 말할 때 서양인의 이러한 본능적인 감각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중국인은 아무리 많은 사람이 그를 쳐다보아도 개의치 않는다. 어느 때 쳐다보든지, 얼마만큼 시간을 쳐다보든지 상관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를 쳐다보는데 대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서양인을 병적인 행위가 아닌가, 의심한다.

서양인은 잠 잘 때 조용해야 할 뿐만 아니라 아플 때면 더욱 조용해야 한다. 그가 예전에 조용히 할 것을 요구해 본 적 없을지라도 일단 아프면 불필요한 소란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그의 건강을 위하여 그의 친구, 간호사, 의사 모두 협력하여 공동으로 상대적으로 조용한 환경을 유지하기에 애쓴다. 만약 강복(康復)이 가망이 없더라도 환자는 가능한 많은 안정을 얻게 될 것이고 그것은 이왕의 어떤 안정보다 더욱 안정할 것이다. 중국인과 서양인의 습관은 환자를 돌보는 행위에서 뚜렷한 차이가 드러난다. 중국에서는 어떤 이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문이 일단 나면 그의 친구들과 이웃들이 방방곡곡에서 모여들어 위로한다. 일반적으로 문병의 숫자가 병의 위중정도와 정비례를 이룬다. 아무도 환자의 안정을 생각하지 않는다. 적어도 그런 움직임조차 아예 보이지 않는다. 그 많은 방문객이 다녀가는 것을 초대하고 또 곧 죽음이 강림하는데 대한 두려움에서 나오는 울음소리, 특히 중들이 귀신을 쫓는 으스스한 분위기 등등 환자를 괴롭힌다. 이와 같이 이별의 ‘양호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은 서양인이 볼 때 죽음이 일종 행복의 초탈을 잃게 되는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자아낸다. 우리는 모두 그 유지인사인 프랑스 부인을 매우 동정한다. 그녀는 방문객에게 다음과 같은 한 마디를 남겼다. “당신의 양해를 구하노라. 나는 죽느라 한창 바쁘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이러한 호소가 있을 수도 없고 설사 있다하여도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 복잡다단한 세상에서 사람들은 근심과 초조함은 피할 수가 없다. 이 면에서 중국인은 다른 민족처럼 시련을 겪었을 뿐만 그 정도가 더욱 심각할 것이다. 어떤 곳이든 어느 곳이든 모두 상당한 비례를 차지하는 사람들이 늘 죽음의 변두리에서 헤매고 있는데 이것이 곧 그들의 사회생활의 현주소이다. 하나님이 조금만 눈을 감고 있으면 며칠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수천수만의 사람이 굶어죽는 것을 의미하고 또 며칠 동안 연속 비가 쏟아지면 그들의 살림이 홍수에 휩쓸려 간다고 여긴다. 때문에 하늘의 뜻에 맡길 수밖에 없다. 어떤 중국인이든 송사에 휘말리기 십상이다. 그가 아무리 무고할지라도 연루되고 심지어 가산을 탕진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많은 재난이 교묘하게 찾아드는데 마치 잘 달궈놓은 쇠가 천천히 냉각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볼 바엔 가장 공포스러운 일은 기약 없이 재난이 폭풍처럼 강림하여 두려운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다. 중국인은 이러한 일에 직면하면 곧 눈을 뜬 채 참고만 있다. 이것이 이 민족의 특징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무릇 중국에서 기근 세월에 천백만의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이면서도 태연자태를 목도한 자만이 그 속사정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철저하게 이해하려면 반드시 세심한 관찰이 필요하다. 하지만 아무리 세심할지라도 서양인은 역시 진정한 이해는 불가능하다. 마치 중국인이 앵글로`색슨인이 계승하고 발전시켜온 서방사회 개인과 자유권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중국인이 우리와 비해 신경이 굳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동서양이 미래에 문명이 만나고 충돌할 때 이 중요한 주장이 구경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목전에는 감히 예측이 불가능하지만 이 영향이 날이 갈수록 늘어갈 것이다. 우리는 현재까지 여전히 그럴 것으로 믿고 있다. 적어도 적자가 생존한다는 것을. 20세기 생존경쟁에서 구경 ‘신경과민’의 유럽인 아니면 영원히 지칠 줄 모르고 신경이 굳어 있어 감정이 메마른 중국인이 생존적응이 더 잘 될 것인지, 우리는 지켜볼 일이다.

아더`스미스 저
김정룡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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