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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의 성격(6)
6. 똑부러지지 못한 습관
[372호] 2018년 08월 01일 (수) 김정룡 기자 kzl0917@naver.com

6. 똑부러지지 못한 습관

忽視精確

외국인이 금방 중국에 오면 중국인에 대한 첫 인상은 중국인은 모두 천편일률적으로 똑 같다는 것이다. 그들의 얼굴은 하나의 모형에서 찍어낸 판박이 듯하고 복장은 늘 남색이다. 그들의 눈길은 멍하니 한 곳만 주시하는 듯하고 그들의 머릿태는 마치 한 사람이 따놓은 것 같아 한 깍지에서 벗겨낸 두 콩알과도 같다. 그러나 그리 오래지 않은 경력이 필요 없이 아무리 관찰능력이 떨어진 여행객일지라도 모두 알게 될 것이다. 중국인은 전혀 생기가 없는 뇌동(雷同)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그다지 믿음직스럽지 못한 결론이다. 두 곳이 아무리 가까이 떨어져 있어도 말투가 쉽게 설명이 안 되는 차이가 있다. 이러한 차이가 점차 누적되면 나중에 하나의 새로운 방언이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정중하게 우리에게 말하는데 중국에서는 같은 글자도 지역에 따라 읽는 음이 천차만별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늘 귀띔을 당하는데 각지의 풍속이 이러한 차이가 있다. 지금 유행되고 있는 속담으로 말하자면 ‘십리 마다 습관(風)이 다르고 백리마다 습속(俗)이 다르다.’ 이러한 사실은 이르는 곳마다에서 볼 수 있다. 재미나는 것은 같은 차이가 수량의 표준에서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도량형의 표준은 절대로 왔다갔다 오락가락하지 않는데 중국에서는 도량형이 수시로 변하하는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중기준의 존재는 흔히 서양인을 번뇌하게 만들지만 중국인은 이에 대해 매우 당연하다는 태도이다. 두 가지 화폐, 두 가지 저울, 두 가지 척도는 중국인에게 있어서 아주 자연스런 것이며 매우 정상적인 것으로서 절대로 반대에 직면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병(餠)을 파는 사람에게 물었다. “하루에 병 몇 개 빚지요?” 그는 대답하기를 “대개 하루에 100근의 가루를 사용합니다.” 100근의 가루로 병을 몇 개를 빚을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은 교묘하게도 물은 사람의 몫으로 넘어간다. 비슷한 사례가 또 있다. 어떤 사람이 한 농부에게 소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물었더니 그는 최대한의 작은 숫자를 말해 물은 사람을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그리고는 마지막에 하는 말이 가관이다. “뼈대의 무게를 빼고 말했죠.” 한 머슴이 신장이 얼마인지 물음에 엄청 모자라게 심지어 황당하기 그지없는 숫자를 말한다. 재차 물으니 하는 대답이 정말 웃긴다. “어깨 위의 부분은 빼놓고 대답했죠.” 그가 군에 입대한 적이 있는데 물건을 메고 다닐 때 무게를 받히는 쇄골의 높이가 중요했다는 것이다. 중국병사들은 머리 외의 각 부위가 매우 쓸모가 있어 머리는 홀시한다고 한다. 또 재미나는 계산법이 있다. 한 시골 사람이 말하기를 자신이 사는 곳이 읍내와 90리 떨어졌다고 하는데 실제로 걸어보니 차이가 엄청나 다시 물었더니 그는 왕복거리를 합해서 말했다고 대답한다. 아니나 다를까 본래의 거리는 45리였던 것이다.

가장 뚜렷하게 통일이 안 된 것은 동전의 계산이며 동전은 이 제국의 유일한 화폐이다. 아무 지역에서나 이 업계는 모두 10진제이며 이는 가장 간편한 계산방법이다. 그러나 만약 한 사람이 살뜰하게 묻지 않는다면 누구나 한 꼬챙이에 꿴 동전이 100개라고 단언할 수 없다. 중국 18개성을 다 돌아다니지 않더라도 발견할 수 있는데 한 꼬챙이에 꿴 동전은 수량이 각양각색이고 모두 통일적인 규칙도 없어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이론상의 100으로부터 실제의 99, 98, 96, 83(山西省會)에서 33개까지(직할시 동부) 가능하면 이보다 더 적은 곳도 있을 것이다. 은전을 팔 때 마찬가지로 이러한 차이가 존재하는데 그 부풀림의 정도는 더욱 심각하다. 두 곳의 ‘양(兩)’이 같은 것이 없다. 우연히 아닌 외에는 그렇다. 같은 지역에서도 같지 않은 ‘양(兩)’이 허다하다. 이에 익숙지 못한 사람은 어리벙벙해서 손해 보기 십상이다. 당신이 전문 은전과 씨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이로 하여 수많은 성실한 사람들을 골치 아프게 하지만 중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모두 착한 백성이다. 화폐의 이러한 혼란을 조성하는 동기는 명확하지만 우리의 관심은 사실에 국한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이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각종 도량의 표준은 모두 이렇게 혼란스럽다. 말(斗)도 이 지방과 저 지방이 다르다. 이러한 혼란을 이용하여 곡물교환에서 폭리를 취하고 있는데 만약 중국인이 평화적인 민족이 아니라면 매우 쉽게 정치폭동이 일어날 것이다. 세계적으로 1프랑은 곧 1프랑이고 1파운드는 곧 1파운드이지만 중국에서는 1프랑은 1프랑이 아니고 1파운드는 1파운드가 아니다. 매 한 가지 변화마다 모두 그 이론토대가 있을뿐더러 무수히 보편적인 실천을 거쳤을 것이다. 예를 들어 소금 전매에 있어서 아주 갑질의 도량표준을 정해놓고 있다. 열두 양(兩)이 한 근이지만 사는 사람은 열여섯 양의 돈을 지불하고 열두 양의 소금을 갖는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은 공개적이며 모든 소금장사는 다 이렇게 하고 있어 사기는 존재하지 않고 만약 어떤 사람이 이것을 문제 삼아도 그들은 소금을 팔고 사는 업계의 하나의 관행으로 치부할 뿐이다. 유사한 불확정성은 토지의 측량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어떤 지역에서는 한 무의 땅은 기실 다른 지역의 반무만큼 크다. 우연하게 이 두 지역 경계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두 가지 측량설비를 갖고 같지 않는 무를 재여야 할 것이다.

중국에 와서 장사하는 사람이라면 당지의 근이 얼마인지를 똑똑히 모르고 한 근의 양식과 솜의 가격을 확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같은 상황으로 볼 수 있는데 무당 양식 산량을 통계 내는 일에서도 늘 무(畝)가 고정적이 아니라는 이 치명적인 사실을 홀시하게 되는 것이다. 거리의 원근을 말하는 낱말도 보편적으로 일치하지 못하다. 이 점에 대해 중국에 여행 오는 사람이라면 아무나 모두 느낄 기회가 있을 것이다. 육지에서 여행할 때 만약 리(里)에 따라 거리를 계산하게 된다면 곧 반드시 이 ‘리’가 제도상의 것인지 똑똑히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렇게 거리를 예측하는 것이 일정한 도리가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지만 우리가 부정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계산방법의 정확성(精確性)과 일치성이다. 우리가 알기로는 통상적으로 이 제국의 대로를 벗어나면 리가 곧 길어진다는 것이다. 만약 대로상의 하루 길은 120리라면 향촌에서는 100리, 산길은 곧 80리이다. 이외 중국인이 볼 바엔 이러한 계산 방법이 흔히 절대 거리에 의거하지 않고 당신이 걷기가 곤란한 정도에 의거한 것이 된다. 이렇게 하여 산꼭대기까지 90리인데 실제로 절반에 이르지 못하고도 중국인은 한사코 90리라고 우겨대는데 산을 오르는 것과 평지에서 걷는 90리 길에 드는 힘이 같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직선상의 거리를 재는 일에서도 특이한 일이 일어난다. A에서 B에로의 거리가 B에서 A에로의 거리와 같지 않다는 것이다. 아키미더의 기본정리에 따르면 “등량 간에는 피차 같다.”인데 중국에서는 이 말에 부정의 수식어를 끼워 넣어 수정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의 예를 들어 이를 증명할 것이다. 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교통 주간도 중의 하나는 북에서 남으로 183리인데 남에서 북으로는 190리이다. 이상한 것은 아무리 당신이 수차례 다녀오고 아무리 당신이 자세하게 재여도 이러한 차이는 정확하다고 인정하고 있으며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확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외 지식상의 현상도 이와 비슷한 사례가 있다. 중국에서는 ‘모듬이 부분의 합’이라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강에서 항행하면 더욱 이렇다. 물어서 알게 된 앞거리 40리를 자세하게 분석해보면 이 40은 2개의 18로 이뤄지고 있다. 사람의 입을 다물게 하는 것은 ‘4개의 9는 40’이 되고 마찬가지로 ‘3개의 18이 60’이 되는 것이다. 뭐 대략 모두 이렇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재미나는 일을 들었다. 한 우편배달원이 규정된 시간 내에 목적지에 이르지 못했는데 변명하기를, “이 60리 길이 너무 길어서 도무지 안 되겠네.” 이 말을 들은 그의 상사가 사람을 시켜 재여 봤더니 83리였다고 한다.

도시의 변두리 한 도로에 6리 간격으로 몇 개의 마을이 있는데 모두 ‘삼리촌’이라고 부른다. 1리 되는 길이의 도로에 만약 양측에 모두 집이 빼곡이 들어서면 곧 5리가 된다. 마을 사람들은 확신을 갖고 곧 5리라고 우겨댄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든 표준과 규칙은 실제로 개개인이 모두 자신을 위해 정해놓은 것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저울을 만드는 사람이 시가지에 넘쳐나고 그들은 매 한 사람 고객의 뜻에 따라 눈금을 새겨준다. 그의 매 사람 고객은 모두 두 가지 저울을 소유하고 있는데 하나는 사 들일 때, 다른 하나는 팔아 치울 때 사용한다. 저울이 낡은 것이라면 그 저울을 사는 사람은 없다. 이유는 저울 눈금이 줄곧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매자의 요구에 따라 그 자리에서 눈금을 새겨주고 있다.

중국인은 나이를 따질 때도 똑부러지지 못한 민족성향이 유별나게 체현되고 있다. 전혀 상관이 없는 띠로서 한 사람의 가장 근접한 연령을 밝힐 수 있고 이 방법을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한 노인이 ‘칠팔십 세’라고 하지만 지난해에 금방 칠십이 되었다. 사실상 한 사람이 중국에서는 금방 칠십이 지나도 팔순으로 되는 것이다. 만약 정확한 나이를 알고 싶으면 당신은 반드시 ‘넓은 범위의 평균연령’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매 한 사람의 중국인이 아무리 당신에게 정확한 나이를 알려준다고 하지만 그가 말하는 나이는 다음 춘절 이후의 나이일 것이다. 왜냐하면 춘절이 전체 중국인의 ‘생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십’으로 나이를 따지는 것은 이미 뿌리 깊어 적지 않은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일이십 세’ ‘몇 십 세 안됨’ ‘몇 십 세 잘됨’ 이런 식이지 중국에서 정확하게 똑부러지게 자기 나이를 말하는 사람을 만나기 어렵다. 이와 같은 모호한 개념이 ‘백’ ‘천’ ‘만’에도 확대되는데 이것들은 중국에서는 평상시에 흔히 사용하고 있는 극한숫자들이다. 이보다 더욱 정확한 계산방법이 있을지라도 중국인은 전혀 관심이 없다.

안면이 있는 사람이 나에게 알려준 사실인데 두 사람이 200적전(吊錢, 1吊錢은 10銅元)을 쓰고 연극을 보았다고 했다가 다시 말하기를 “173적전을 썼는데 200적전과 비슷하지 않느냐? 맞죠.”

한 신사가 아내와 함께 중국에서 몇 년 간 생활하다가 귀국하게 되어 출발하려고 할 때 그들의 중국 친구가 두 폭의 아름다운 두루마기를 보내왔는데 그들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 각자 건재하신 모친에게 증정하는 것이었고 두 분은 마침 동갑내기였다. 첫 번째 두루마기에 ‘복여동해(福如東海)’와 ‘수비창송(壽比蒼松)’이라 쓰고 옆에 작은 글씨로 한 구절의 설명을 곁들었는데 이 두루마기를 받는 분은 이미 ‘칠십복수(七十福壽)’를 얻었다고 적었다. 두 번째 두루마기에도 이와 비슷한 문구가 적혀 있었지만 옆에 작은 글씨로 이미 ‘육십영광(六十榮光)’을 누렸다고 적었다. 선물을 받은 외국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두 분이 모두 60세인 동갑내기인데 왜 한 분에게는 ‘칠십’일 쓰고 다른 한 분에게는 ‘육십’이라 했는가?” 이에 하는 대답이 가관이다. “만약 매 폭의 두루마기에 모두 똑 같이 ‘칠십’이라 하면 얼마나 창의성이 떨어져 보이겠는가!”

중국인의 공동의 이익, 정서로 생겨나는 복잡한 사회유대관계가 우리들이 그 똑부러짐이 결핍한 특성에 대한 이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한 법률자문을 구한 중국인이 나에게 말하기를 그는 어느 작은 시골에 살고 있다고 하는데 그와의 대화 중에 그가 이미 그 곳에 거주하고 있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다시 물었더니 그는 확실히 그 것에서 살고 있지 않다고 인정했다. 좀 깊이 있게 대화를 나누면서 알게 되었는데 그는 19대 이전에 이미 거기서 살지 않았던 것이다. “당신은 지금 도시에 살고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었냐?”고 물었더니 그는 “맞다. 하지만 비록 우리들이 지금은 그 곳에 살고 있지 않지만 옛 뿌리는 여전히 그 곳이 아니냐?”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또 다른 한 사람이 나를 불러 그가 살고 있는 시골마을에 있는 옛묘를 구경시키고 나서 “이 옛묘는 내가 수건(修建)한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자세히 관찰해보니 이 옛묘는 300년 전 명나라 00황제 재위 시 건립된 것이었고 그 때의 ‘나’는 아직 허환(虛幻)된 몽롱하게 잠든 세상에 있었을 것이다.

한어(漢語)를 배우는 학생이 우선 부딪히는 곤란은 곧 많은 비슷한 표현방식 중에서 능히 신분을 확실하게 밝힐 수 있는 만족스런 그런 표현방식을 찾는 것이다.

중국인의 온갖 사고시스템은 일련의 가설 위에 세워지는데 이 가설은 우리 서양인의 습관에 의한 가설과 완전히 다르다. 서양인이 사물에 대해 확실하게 알려고 하는 그 갈망에 대해 중국인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 중국인은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에 몇 호의 인가가 살고 있는지를 모른다. 알려고 들지도 않는다. “어떻게 그런 숫자적인 것을 알려고 드는지?” 그에게 이것은 하나의 수수께끼일 것이다. 그들의 숫자가 나타내는 것은 ‘몇 백’ ‘수백’ 혹은 ‘적지 않은’ 이런 것들이지 확실한 숫자는 종래로 없었으며 영원히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중국인이 숫자를 사용하는 면에서의 특징은 똑부러짐이 결핍하다는 것이다. 이런 특징은 문자의 쓰기와 인쇄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중국에서는 틀린 글자가 없는 염가의 책을 구하기 매우 힘들다. 어떤 때는 오타된 글자가 마땅히 사용되어야 할 글자보다 훨씬 복잡하다. 이런 착오는 힘을 덜 기울이려고 하는데서 빚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똑부러짐에 대한 중시가 부족해서 생겨난 결과이다. 같은 상황은 상용글자 사용에서도 나타나는데 한 개의 글자는 늘 다른 발음이 같은 글자로 씌어지는데 이런 착오는 반은 지식상의 결핍이고 반은 세심하지 못한 데서 빚어지는 결과이다.

중국인의 똑부러짐을 무시하는 습관은 편지의 이름, 주소의 제사(題寫)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한 통의 보통의 중국인의 서신에서 눈에 번쩍 띄는 거창한 호칭을 쓰고 있다. ‘부친 어르신’ ‘자모(慈母) 어르신’ ‘숙공(叔公) 어르신’ 등등이다. 하지만 모든 어르신의 이름은 통상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우리들의 관찰에서 발견한 것인데 중국인은 실제를 매우 강구하는 민족이지만 개인의 이름은 확실함을 강구하지 않는데 이것은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하다. 중국에 온 후 우리는 늘 보는 건데 이름이 자주 변한다는 것이다. 한 때 이 글자였다가 또 한 때는 저 글자를 쓰기도 한다. 어느 것을 쓰던지 모두 맞는 것이 된다.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은 한 사람이 몇 개의 같지 않는 이름이 있고, 그의 성, 그의 호 또 한 개의 별도의 이름이 있는데 그것은 과거시험에 전용으로 쓰는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외국인은 하나의 중국인을 두세 사람으로 착각하기 십상이다. 마을의 이름도 확정치 못하다. 어떤 때는 두세 가지 완전히 다른 모습인데 어느 하나도 ‘합당’하게 인정되지 않고 있다. 만약 그 중 명칭이 잘못 되면 돌아가면서 잘못 사용되고 혹은 하나는 관용(官用)이고 다른 하나는 일상대화에서 사용되고 있고 혹은 오용(誤用)을 형용사로 삼고 원명(原名)과 함께 복합적인 호칭으로 될 수도 있다.

불행한 것은 중국인은 화학 등 자연과학상의 교육이 극히 결핍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영역은 절대적으로 정확성과 준확성이 수요 되고 있다. 중국 제1대 화학자는 가능하게 수량의 정확성에 대해 주의를 돌리지 못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일이십 곡(谷, 영국 최소단위인 6.48미리그람)’과 ‘몇 십 개의 곡’을 혼돈하고, 혹은 이와 유사한 착오가 발생한다면 결과는 예측불허의 화를 불러올 것이다. 중국인은 모든 사물 중에서 정확성을 배워 낼 능력이 있다. 마치 기타 민족이 일찍 배운 것과 같이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잘 할 수 있다. 그들의 거대한 인내심은 타고난 것이기 때문에. 그러나 우리는 말한다. 목전 이 민족의 개개인은 이러한 소질을 완전히 구비하지 못하고 있을뿐더러 무엇이 정확성인지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이 말이 맞다면 아래 두 가지는 마땅히 도리가 있을 것이다. 첫째, 우리들이 중국역사를 연구할 때 반드시 충분히 이 점을 고려한 것인데 중국의 숫자와 수량은 종래로 정확하지 않아 우리들이 매우 쉽게 사기 당했다는 것이다. 둘째, 중국인이 ‘인구조사’를 명분으로 여러모로 몸값을 높이고 있다는 것이다. 상식에 따르면 모듬이 부분의 총합에 비해 크지 않지만 중국에서는 계산방법이 반대이다. 모듬이 각 부분의 총합에 비해 크다는 것이다.

아더`스미스 저
김정룡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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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ithl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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