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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 수필] 책으로 만난 세상
[240호] 2013년 01월 20일 (일) 유화 기자 liuhua1105@hotmail.com
   

  어릴 때부터 나는 나만의 물건을 많이 가져 보지 못했다. 집은 작고 시골에 살았으며 오남매 중 막내인 내게 내 것이라 할 것이 뭐가 있었겠는가? 내 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옷도 세 명의 언니들이 돌아가며 몇 해씩 입고 물려주면 그걸 받아 입는데 만족해야 했다.


 다른 집과 달리 시골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계셨던 아버지 덕분에 우리 집에 넘치게 많은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종이와 책들이었다. 아버지의 전 재산과도 같은 수학, 물리 교재들, 문제풀이집, 참고서적들과 아버지가 수시로 꺼내어 쓰는 필기장들은 늘 방에서 여기저기 굴러다녔고 엄마의 잔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엄마와 언니들이 아껴보는 [청년생활]과 [대중영화]같은 월간잡지들, 오빠가 좋아하는 시집들, 그리고 책장이 아닌 옷장의 한구석에 보물처럼 모셔놓고 있는 [모택동 선집] [자본론]과 같은 난해한 책들도 나의 어린 손을 거쳐 갔다. 내 기억 속에 제일 많이 등장한 단어는 아마도 인민이나 혁명, 계급 것들이었는데 나는 그 지루하고 우리 사는 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어 보이는 책을 아버지가 왜 애지중지 아끼고 계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늘 재미있고 신기한 책을 찾아다녔다. 집안에 있는 책들을 다 뒤져도 내가 읽을 만한 것은 없었다. 


 인형도 없었고 초콜릿도 몰랐던 어린 소녀는 어느 날 우연히 오빠가 빌려온 낡은 책을 뒤적거리게 되었고 걷잡을 수 없이 그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것은 중국고전 [수호전]이었는데 조선어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조선어로 쓰인 중국고전들은 그때 어디서 인쇄되어 어떻게 그 작은 변방의 조선족 시골마을까지 유포되었는지 참 신기하기만 하다. 표지도 없고 삽화도 없었다. 낡다 못해 누렇게 변색된 종이위에 깨알같이 인쇄된 한글의 묘사력은 신기하고 오묘하고 마법 그 자체였다. 그 마법의 글씨들을 좇아 나는 적막한 시골을 벗어나 머나먼 고대로 거슬러가 칼을 휘두르는 여걸로 자라고 있었다. 앞집 사는 김씨 할아버지의 책인걸 알고는 짬만 나면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졸랐다. 김씨 할아버지의 입에서 청산유수처럼 흘러나오는 구수한 고전이야기들을 들으며 나는 느껴본 적이 없는 행복감에 도취되었다. 책들은 남루하기 짝이 없었지만 읽었던 누군가에 의해 표지가 두 번 세 번 만들어 입혀지면서 앞집에서 뒷집으로 또 옆집으로 소중하게 전해졌다. 책은 닳아도 이야기는 닳지 않는 고전의 힘이다.


 한번은 뒷마을에 놀러 갔다가 친구네 집 뒷간에서 볼일을 보고 나오려는데 화장지함에 놓여있는 절반쯤 찢겨나간 책 한권이눈에 밟혔다. 세상에 내가 그토록 가지고 싶어 했던 [삼국지]가 아니던가. 이런 책이 뒷간에 있다는 것은 주인에게 버림을 받았다는 얘기다. 이게 웬 떡이냐 나는 냉큼 쥐고 집으로 달려와서 이틀이고 삼일이고 말 한마디 없이 책속에 풍덩 빠져버렸다. 이 책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 소유한 사유재산이었다. 읽고 돌려줘야 한다는 강박증 같은 건 없어도 되었다. 제 몇 권인지도 알 수 없고 앞뒤분량이 상당수 누군가의 엉덩이와 코를 닦는 용도로 쓰인 불완전한 몸이긴 하지만 나는 오빠에게 뺏길까봐 장롱 속에 깊이 감춰두고 심심하면 몰래 꺼내 읽곤 했다. 


 중국고전들은 한자표현이 너무 많아 열 살의 나에겐 너무 어려웠지만 온갖 상상과 추리를 펼쳐가며 읽어내려 애썼다. 아무리 아버지가 교사였어도 역사나 소설 따위엔 관심 없는 아버지보다 내가 알고자 하는 세상에 등대가 되어주는 동네 할아버지들을 나는 더욱 따랐다. 시퍼런 장검을 휘두르는 영웅호걸들이 왕후장상을 조롱하고 천하를 호령하는 장면은 평화로운 시골아이들에겐 너무 큰 자극이었다. [수호전]을 서너 번 읽고 난후 나는 108명의 호걸과 그들의 별호를 막힘없이 외우곤 했는데 걱정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아버지만 빼고는 모두가 신기한 듯 나를 쳐다보았다.


 학교에서 날씨관계로 실외운동이 안될 때는 체육선생님이 교실에 모여앉아 [임꺽정]을 청해듣는 것이 그 어떤 수업보다 즐거웠다. 수업이 끝나는 종소리가 울리면 아이들은 속이 타서 미칠 지경이었다. 가끔은 이야기를 선생님 기분가는 대로 지어내는 것을 눈치 채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이에 반발하는 아이는 없었다. 고전소설을 많이 읽는 체육선생님은 박학다식의 대명사였기에 아이들 속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셨다. 몇몇 담대한 아이들이 찾아가 책을 빌려보겠다고 청하면  선생님은 짐짓 놀라는 표정으로 “너희들이 읽어버리면 내 이야기가 재미없질 않겠냐.”며 거절하군 하셨다. 실은 들킬 까봐 그러셨는지도 모른다.


  중학교 2·3학년 즘 되어 경요와 같은 대만 여류작가들의 멜로소설이 유행했다. 사춘기의 소녀들은 수업시간에도 책상 밑의 주인공에게 빠져있었다. 열정적이고 순수한 사랑이야기를 이토록 가슴이 찡하게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경요뿐이라고 믿어마지 않았다. 역사고전을 통해 웅장한 스케일과 영웅호걸의 남성스러움에 익숙해져 있던 나는 경요의 소설들로 인해 다시 조심스레 섬세하고 민감한 소녀로 돌아왔다. 선생님이 없는 자습시간엔  읽으면서 볼이 발갛게 상기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슬퍼서 콜작거리는 아이도 있었다. 수업이 끝나면 고개 숙인 여자애들이 줄줄이 교무실로 불려가곤 했는데 그 중에 나도 가끔 끼어있었다. “너희들 연애질이나 하려고 이딴 책 보는 거지.” 엄하게 꾸짖는 소리와 함께 책상위에 내동댕이쳐진 멜로소설들은 다시 젊은 선생님들이 학생들 몰래 돌려보군 했다. 마법의 언어에 중독되면 빠져나오기 쉽지 않다는 것을 선생님들은 더 잘 알고 있지 않았을까. 


 80년대 초, 흑백TV도 흔하게 볼 수 없었던 시골에서 늘 막연한 갈증을 느껴왔던 우리는 이야기가 살아 숨 쉬는 책들을 통해 일탈을 꿈꾸고 화려한 외부세상과 만났다. 그리고 꿈은 더 한층 풍부해졌다. 꿈에서 우리는 늘 영웅호걸이거나 숲속에서 잠자는 청순가련형의 아름다운 소녀 그리고 백마를 탄 왕자가 되어 있었다. 서점만 가면 책이 너무 많이 쏟아져 나와 무엇을 읽어야 할지 망설이는 지금의 시대, 가난했지만 책 몇 권으로 너무 행복했던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글 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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