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페이지로|[ 18.07.17(화) 구인고충상담기사제보신문지면보기
신문사소개 | 구독신청아이디/비밀번호
> 뉴스 > 기획/특집 > 인물/인터뷰
     
중학교수준에 외래어사전을 펴내-박춘근 씨와의 인터뷰
[220호] 2012년 03월 25일 (일) 유화 기자 liuhua1105@hotmail.com
   

“노력하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어요.”
 중국동포 박춘근씨가 다년간 한국생활체험에서 얻은 결론이다.


 박춘근씨는 1950년 10월 24일 중국 흑룡강성 연안현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때 문화혁명을 맞아 배움의 길이 막혀버려 대학진학이 물거품이 되었다. 그때 그 시절에 거의 다 그러했듯이 박춘근씨도 문예선전대에 가입하여 악기를 다루며 두각을 나타냈다. 10년 동란기간 그렇게 허송세월을 보냈다. 개혁개방을 맞아 전문예술학원 문을 나오지 못한 박춘근씨는 악기로는 밥을 먹고 살 수가 없었다. 흑룡강성 대외무역가공공장에 취직하여 열심히 기술을 습득하였다.


 1990년대 한국바람이 쓰나미처럼 조선족사회를 휩쓸었다. 박춘근씨도 1995년 코리안드림의 길에 올랐다. 손재주를 타고 난 그는 한국이불공장에 취직하여 재단사를 맡았다. 그러나 이불재단사 직업이 그의 적성에 잘 맞지 않아 1년 반 만에 그만두고 엘리베이터제조회사에 근무하게 되었다. 부지런하고 손재주가 뛰어난 박춘근씨는 취직하여 얼마 안지나 생산주임을 맡았고 2년 뒤에 공장장으로 고속 승진하였다.


 박춘근씨가 조선족의 신분으로 한국기술업체에서 그토록 빨리 성취를 이루기까지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
 1997년 말 한국이 IMF를 겪으면서 줄줄이 부도를 맞은 회사가 많았다. 박춘근씨가 근무하는 회사도 도미노 같은 파도를 피해가지 못하고 파산을 맞게 되었다. 그는 밤낮 쉬지 않고 스스로 설계하고 구조조정을 거친 나머지 몇 안 되는 직원을 데리고 열심히 노력하여 다시 회사를 살렸다. 그 과정에 중국에서는 기계설계를 수공으로 하였는데 한국에서는 컴퓨터를 조작(操作)하여 처음엔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그대로 물러 설 수가 없었다. 어깨너머로 배우고 책을 구해 끈질기게 탐구한 덕분에 1999년부터 본격적으로 컴퓨터로 설계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에선 전기제품은 웬만한 고장이 나면 버린다. 폐철로 처리된다. 회사가 어려우면 새것 사기가 벅차다. 박춘근씨는 폐철무지에 버려진 선풍기를 여섯 대 손보고, 용접기를 여덟 대 고쳐내는 등 부지런히 움직여 회사에 자금도 절약해주고 직원들이 시원한 환경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사장의 맘을 확 끌었다.
   


 한국에 와서 어려운 일이 무엇이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박춘근씨는 “중국에서 나름대로 자신감을 갖고 살아왔는데 한국에 와서 처음엔 기가 죽어 위축감이 들고 언어 때문에 많이 힘들었다.”고 말했다. 조선족은 한국인과 같은 민족이지만 언어가 달라 많이 애먹었다고 그는 술회했다. 한국인이 일상생활에서 외래어를 많이 사용할 뿐만 아니라, 특히 제조업에서 기계에 관련된 용어가 영어로 된 것이 굉장히  많아 무척 힘들었다. 외래어관문을 넘지 못한다면 제조회사에서 기술로 승부를 볼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자신이 읽힌 것을 하나하나 메모하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에 1,600개 외래어단어를 정리할 수 있었다.


 1999년 박춘근씨는 재한조선족 중 악기에 재능이 있는 16명을 묶어 악단을 만들었다. 그런데 악단단장인 박춘근씨가 아마추어이고 나머지는 전부 중국에 있을 때 예술단, 문공단에서 악단단장을 맡았거나 혹은 그 분야에서 내노라하는 전문가들이었다. 아마추어가 프로를 이끌었던 것이다. 악단을 중심으로 ‘풍우동주, 금의환향(風雨同舟, 錦衣還鄕)’, 즉 재한조선족정서에 맞게 ‘風錦’친목회를 결성하였다. 그는 회원들에게 한국생활에서 외래어 관을 넘게끔 도움을 주고자 자신이 정리한 외래어를 복사하여 나눠주었다. 회원들의 입을 통해 재한조선족사회에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책자를 만들면 좋겠다는 제의가 끊임없이 들어왔다. 2006년 7월 박춘근씨의 <상용외래어 해석집>이 3만 부나 출간되었고 산업인력공단 취업교육기관에서 정식 교재로 채택하였다. 2007년 3월 그는 사비로 2,000부 출간하여 지인들에게 증정하였다. 2012년 3월 산업현장용어와 연변사투리와 한국어비교 등 내용을 추가하여 재판을 눈앞에 두고 있다.


 박춘근씨는 본래 글쟁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한국생활10년 동안 60여 편의 글을 발표하였다. 그 중 <한국의 ‘평(坪)’ 단위가 국제표준에 맞지 않아 제곱미터를 도입해야 한다>, <차는 우측통행인데 사람은 좌측통행이니 불편하다>는 내용의 글이 발표된 지 불과 수개월 이후 한국에서 고치기 시작했다. 그는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글이 발표되자 법이 바뀌어 기분이 굉장히 좋았다.”고 토로하였다.
 기자는 현재 조선족 젊은 층이 한국에 입국하는 수가 증가하고 있는데 그들한테 남기고 싶은 말을 부탁

했다. 박춘근씨는 “타향에서 건강을 잘 챙기고 열심히 일을 하는 동시에 젊은이들은 배움에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당부를 남겼다.

유화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 동포타운신문(http://www.dongpotown.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전체기사의견(0)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전체기사의견(0)
sk텔레콤
< ahref=http://www.kqci.kr>
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152-800 서울시 구로구 가리봉동 122-19 정풍빌딩 3층 | Tel 02-837-4470 | Fax 02-837-4407
Copyright 2009 동포타운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ongpotown@daum.net
동포타운신문을 통해 제공되는 모든 콘텐츠(기사 및 사진)는 무단 사용, 복사, 배포시 저작권법에 저해되며,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